■ 홍의장군 곽재우 4편
■ 홍의장군 곽재우 4편
첫 갈등은 전란이 일어난 직후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粹)와 관련된 것이었다. 1592년 6월 김수가 패전하자, 곽재우는 그를 패장(敗將)으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수도 곽재우가 역심(逆心)을 품었다고 맞섰다. 이 대립은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와 1594년 거제도 작전에서도 곽재우는 전략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 다른 장수들과 마찰을 빚었다.
여러 갈등의 결과 나중에는 곽재우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당시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은 곽재우의 자세는 상당한 반발을 가져왔다. 결정적으로 국왕 선조가 그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낙향한 뒤 조정에서는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을 중심으로 그를 다시 기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선조의 반응은 싸늘했다.
『나는 이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한다(1595년(선조 28) 12월 5일). 곽재우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의 처사를 보니 참으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많다. 도체찰사가 격서를 보내 불렀지만 고압적인 자세로 나아가지 않은 것은 무슨 뜻인가.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으니 함부로 병권을 맡길 수 없다(1596년 2월 18일).』
왕명을 대행하는 도체찰사의 부름에 곽재우가 따르지 않자 선조는 그가 왕명을 무시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이런 불신은 이때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그 발원은 앞서 말한 김수와의 충돌이었다. 그때 선조는 “곽재우가 김수를 죽이려고 하는데, 자신의 병력을 믿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이 사람이 함부로 감사를 죽이려고 하니 도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연려실기술》
대표적으로 이순신에게 그랬듯이, 뛰어난 무공을 세운 의병장을 보는 선조의 이런 태도는 상당한 문제였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뒤 정유재란의 조짐이 뚜렷해지자 곽재우는 다시 경상좌도 방어사(防禦使. 종2품)에 기용되었다. 일단 그는 현풍의 석문(石門)산성을 수축해 주둔하다가 창녕의 화왕(火旺)산성으로 옮겼다. 그러나 왜란에서 곽재우의 활약은 여기서 끝났다. 복상(服喪) 때문이었다. 1597년(선조 30) 8월 계모 허씨가 별세하자, 그는 현풍의 선영에 장사지낸 뒤 강원도 울진(蔚珍)으로 피신해 삼년상을 치렀다. 복상 중에도 기복(起復)하라는 명령이 몇 차례 내려졌지만 그는 상중(喪中)이라고 거절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