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의장군 곽재우 3편
■ 홍의장군 곽재우 3편
7월에는 현풍ㆍ창녕 등지에서 승리해 경상우도에서 왜군의 진격을 차단했고, 왜군에 항복해 길잡이 노릇을 하던 공위겸(孔撝謙)을 매복작전으로 체포해 처형했다. 10월에는 왜란 초반의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큰 전투였던 제1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했다. 그들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을 교란해 승전에 기여했다.
"곽재우가 구사한 전술은 기본적으로 유격전이었다. 그는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위장술과 매복전술 등의 변칙적 방법으로 적을 교란하고 무찔렀다. 이것은 전력과 물자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었던 의병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술이었을 것이다. 곽재우는 이런 전공으로 벼슬을 받았고 계속 승진했다. 그는 유곡찰방(幽谷察訪. 1592년 6월. 종6품)·형조정랑(8월. 정5품)을 거쳐 경상도 조방장(助防將. 정3품)에 임명되었고, 1593년 4월에는 성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왜란이 발발한 지 1년 만에 그는 경상우도 방어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군사 지휘관에 올랐다. 싸움을 할 때면 곽재우는 붉은 비단 철릭(帖裏)을 입고 백마를 탄 채 천강홍의대장군(天降紅衣大將軍)의 깃발을 내걸고 의병들을 진두지휘했다. 그래서 곽재우는 본명보다도 홍의장군으로 더 잘 알려지기도 했다.
",일본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금방 끝날 것 같던 임진왜란은 내륙의 의병과 해전의 이순신이 활약하면서 1593년 후반부터 장기전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전황의 변화에 따라 곽재우의 역할도 바뀌었다. 그 동안도 그는 왜군의 대규모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으려면 산성을 거점으로 방어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져 1594년부터 삼가(三嘉)의 악견(岳堅)산성, 가야산의 용기(龍起)산성, 지리산의 구성(龜城)산성 등 경상도 일대의 산성을 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이순신ㆍ원균 등과 함께 거제도를 탈환하는 작전에 참여했지만, 왜군이 대응하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다. 12월에는 가장 주요한 격전지 중 한 곳인 진주목사에 임명되었고, 경상도 관찰사ㆍ경상우수사 같은 요직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관군들이 수급(首級:적군의 머리)을 챙겨 공을 인정받기 급급할 때 곽재우는 부하들을 처음부터 단속해 수급을 베지 못하게 했다. 곽재우의 출병은 출세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직 나라를 지키고 고향을 보호하기 위한 충정에서 우러난 일이었다. 그런 곽재우가 이후 전쟁 기간 동안 관직을 받아들인 것은 의병들에게 부족한 무기와 군량미를 관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충당받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곽재우는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본격화되던 1595년 가을에 관직을 버리고 본관인 현풍으로 낙향했고, 거기서 2년 동안 칩거했다. 승전을 거듭해 계속 중용되던 의병장이 갑자기 낙향한 이례적인 사태의 가장 큰 까닭은 조정과의 불화였다. 그 뒤 은둔해 곡기를 끊고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행적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곽재우는 기본적으로 직선적이고 비타협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그는 이런저런 갈등을 겪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