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의장군 곽재우 2편
■ 홍의장군 곽재우 2편
그의 삶은 세속과 어느 정도 절연(絶緣)한 것이었지만, 일정한 경제적 기반 없이는 영위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광해군일기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에서는 이때 그가 그냥 은둔한 것이 아니라 농업경영에 힘써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기록했다(1617년(광해군 9) 4월 27일).
곽재우의 재력은 실제로 작지 않은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 곽재우의 전공을 보고한 장계에서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은 그의 집안이 매우 부유했는데, 의병을 모집하는 데 재산을 모두 희사(喜捨:목적을 위해 기꺼이 돈이나 물건을 내놓음)했다고 기록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당시 의병활동에 참가한 양반들은 대부분 수백~수천 마지기의 토지와 200~300명의 노비를 소유했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하면, 곽재우도 그것과 비슷한 경제력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최대의 국난은 곽재우가 은거한 지 4년 만인 1592년 4월에 발발했다. 그때 곽재우는 40세의 장년이었다.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빠지자, 그는 지체 없이 행동에 나섰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열흘도 안 된 4월 22일에 고향인 의령현 세간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기의(起義)는 호남ㆍ호서의 의병보다는 한 달, 김면(金沔)ㆍ정인홍(鄭仁弘) 부대보다는 50일 정도 빠른 최초의 의병이었다. 이런 정황에는 그가 살던 의령이 일본군의 초기 침략지역과 가까웠다는 까닭도 작용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역시 그의 애국심과 실천력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그의 부대는 거느리던 노비 10여 명으로 출발했지만, 이웃 양반들을 설득해 이틀 만에 5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 뒤 그의 의병은 2천 명 정도로 유지되었다.
첫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그 까닭은 불리한 전황이 아니라 조정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물자가 부족했던 그의 부대는 관군이 도망가 비어있던 초계성(草溪城)으로 들어가 그곳의 무기와 군량을 확보해 사용했는데, 합천군수 전현룡(田見龍), 우병사 조대곤(曺大坤) 등이 이런 행동을 오해해 그들을 토적(土賊:지방에서 일어난 도둑 떼)으로 고발한 것이다. 그러나 초유사 김성일의 해명으로 위기를 넘긴 곽재우 부대는 그 뒤 의령을 거점으로 현풍ㆍ영산(靈山. 지금 창녕)ㆍ진주 등 낙동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중요한 전공을 세웠다. 우선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정암진(鼎巖津:경남 의령 소재. 의령과 함안 사이를 흐르는 남강의 나루)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육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조선군이 이긴 최초의 전투로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