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의장군 곽재우 1편
■ 홍의장군 곽재우 1편
곽재우(郭再祐:1552~1617)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크게 공헌한 장수 중 한 사람이다. 곽재우는 많은 의병 중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고, 여러 전투에서 홍의(紅衣)를 입고 지휘해 뛰어난 무공을 세웠다. 그러나 29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옥사한 김덕령(金德齡:1567~1596)의 사례가 대표하듯이, 전란이 끝난 뒤 의병장들은 대체로 공훈에 합당한 포상이나 예우를 받지 못했다. 선무(宣武)공신에 책봉되지 못했고, 이런저런 관직을 거치기도 했지만 끝내는 은둔하면서 ‘익힌 곡식을 끊고 솔잎만 먹다가(벽곡찬송:辟穀餐松)’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곽재우도 그런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죽고 죽이는 처절한 살육이 난무한 전장보다 현실의 정치적 여건은 의병장에게 더 가혹했다.
곽재우는 1552년(명종 7년) 8월 28일 경남 의령현(宜寧縣) 세간리(世干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그가 태어난 의령은 외가인데, 그 뒤 그가 의병장으로 활동한 주요 지역이었고, 그래서 지금 그를 대표하는 지역이 되었다. 역시나 이런 측면은 조선시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남자가 결혼하여 여자의 본가에 가서 삼)의 흔적을 보여준다. 곽재우는 1567년 15세의 나이로 만호(萬戶) 김행(金行. 본관 상산)의 둘째 딸과 혼인했다. 일찍이 영남의 유학자인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으며, 함께 동문수학한 김우옹과 함께 스승 조식의 외손녀사위가 됨으로써 동서간이 되었다. 이 혼사는 그의 자질과 그것에 대한 인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조식은 두 외손사위를 직접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곽재우는 18세 때인 1570년(선조 3년)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 글쓰기 등을 고루 익히고 병법서도 공부했다. 1575~76년에는 의주목사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의주에서 살았으며, 1578년(선조 11)에는 명에 사신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수행해 중국 북경에 다녀왔다. 이때 중국에서 가져온 비단은 그 뒤 임진왜란에서 그의 상징이 된 홍의(紅衣)의 옷감이 되었다.
10대 후반부터 문무를 함께 연마하던 곽재우는 32세 때인 1585년(선조 18) 별시에서 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답안지에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가 있었다 하여 합격을 모두 취소시켰다. 구체적 내용은 기록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는 크게 낙망했을 것이다. 불행은 거듭 찾아왔다. 이듬해 8월 6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곽재우는 선산인 현풍 신당(新塘)에서 삼년상을 치르고 1588년에 탈상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 뒤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의령 동쪽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근처 둔지(遯池)에 정자를 짓고 낚시질을 하면서 지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