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5일 금요일

의녀醫女 5편

■ 의녀醫女 5편

■ 의녀(醫女)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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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녀들 중에는 남자의관 못지않은 발군의 실력을 갖춘 자도 있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역사에 잘 기록되지 못했다. 세종 때 소비라는 의녀는 중전의 질병을 완쾌시켜 왕으로부터 쌀 여섯 섬을 하사받기도 했다. 역시 세종 때 접상이라는 의녀는 어의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었다고 하며 장덕과 귀금은 제주도 출신의 명의였다. 의녀는 국가공무원 신분이었으므로 일정량의 보수를 받았으며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관비 출신이라는 이유로 천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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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녀는 왕비의 출산이나 대왕대비의 질병 치료에도 한 몫을 했다. 어의나 의관들은 바깥에서 의녀가 말해주는 증상과 진찰소견을 듣고 서야 처방을 내릴 수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왕비가 난산을 하다 죽거나 대왕대비가 병사하면 해당 의녀나 의관은 처벌을 받아야만 했던 파리 목숨이기도 했다.

의녀가 의사 역할 이외에 기생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궁중에서 형사 사건을 처리하는데도 규방을 수색하거나 염탐하는 등의 남자가 하기 어려운 일을 의녀에게 맡겼다. 궁녀의 몸을 뒤지면서 범죄의 증거를 찾는 일과 같이 남성 관원들이 담당하기 어려운 일, 즉 여성의 신체를 구속하는 체포, 수색 등의 형사 업무도 관장하여, 의녀가 여형사 역할까지 한 것이다. 특히 광해군은 의녀를 여자 형사로 활용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러나 의녀의 여자 형사 역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중종실록》에는 중종21년(1526) 2월 15일 왕이 직접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조선 중기 이후 의녀가 기생이나 여자 형사 노룻까지 떠맡는 사례는 거의 줄어들었다. 동시에 이때부터 다모라는 여자 형사가 등장해 궁중은 물론 일반 민간인들의 형사 사건에 투입되었다.

그렇다면 의녀들의 급료는 어땠을까?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의녀들에게는 1년에 쌀 1석씩을 제공했다고 한다. 도정한 쌀을 기준으로 하고, 그것을 현대 물가에 적용해 본다면, 연봉은 약 18만원으로 월봉으로 따지면 약 "만오천원" 가량 된다. 그러나, 이것도 모두에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학습 능력이 떨어진 자들에게는 급료가 제공되지 않았으며 흉년에는 제공을 하지 않은 적도 있다. 급료는 전체를 한 번에 주는 것이 아니고 달마다 제공되었는데, 내의는 달마다 간병의는 전달에 점수가 좋은 자만, 견습생은 제공이 안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급료 제공 방식이나 그 양에 있어서는 일관된 것이라기보다는 그 시기에 따라서 조율되었던 듯하다.

현대를 기준으로 보면 턱없이 부족하게 보여 지지만, 신분사회에서 그것도 노예처럼 천시했던 계층에게 급료를 제공한 경우는 매우 우대를 해주는 것이라 봐야 한다. 의녀는 그 신분과 일의 특수성 때문에, 쫓겨나거나 농락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나 반대로 병간호나 의원들의 보조 역할을 잘하여 포상을 받은 경우도 매우 많았다. 여성의 직업이 없었던 조선에서 사람의 몸을 돌보는 의사와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의 역할을 맡는 여성으로서의 의녀(醫女)는 전문직 직업여성임에 틀림없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