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 8편
■ 이순신 8편
조선인 포로를 대대적으로 노예로 끌고 간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으로 잡혀간 도공, 제약기술자, 금 제련공, 농부, 부녀자 등 조선인이 적게는 5만명, 많게는 10만명을 헤아린다. 임진왜란 7년 가운데 ‘살육전쟁’ ‘노예전쟁’의 형태는 바로 이 정유재란 시기 특히 이순신이 수군 지휘관에서 물러난 시기에 결정적으로 심화되고 있었다. 바꿔 말해 이순신이 그대로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조선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조선 민중의 피해는 다소 줄어들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1597년 8월3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았을 때 그에게는 군관 9명과 군사 6명뿐이었다. 수군이 궤멸하고 호남지역의 지상군마저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처참한 상황에서 다시 적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그는 경상도 운곡에서 하동, 구례, 곡성, 보성으로 이동하면서 백성들과 지방 수령들에게 희망을 전했다. 백성들의 호응과 지원이 없으면 전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던 백성들에게 자신이 복권됐으므로 믿고서 생업에 종사하라고 설득했다. 이와 함께 일본군의 호남 진격으로 목숨을 걱정하던 수령들에게도 행정력을 복원해 전쟁에 다시 임할 것을 독려했다. 그 결과 군사들의 모병이 가능하게 되어 피난민은 줄고 백성들까지 참여하는 총력전 체제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순신은 남아 있는 전선(戰船)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명량해전).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으며, 왜군의 수륙병진작전(水陸竝進作戰)을 무산시켜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한양으로 진군하던 왜군은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해 충청도 직산(稷山)에서 진격을 멈추었으며, 그 뒤 전쟁은 남해안 일대의 왜성(倭城)에서 농성하는 왜군을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공격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왜군은 그해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철수를 준비했는데, 이순신은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연합해 노량(露梁)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노량해전).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이순신이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숨이 끊어졌으며, 조카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순신에게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다. 이순신은 1604년(선조 37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으로 녹훈되었으며, 좌의정이 증직되었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643년(인조 21년)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았고, 1659년(효종 10년)에는 남해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1707년(숙종 33년)에는 충청도 아산(牙山)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 ‘현충(顯忠)’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1793년(정조 17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에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