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가 안평대군
■ 예술가 안평대군
뛰어난 젊은 예술가이자 문필가 안평대군은 ‘안평(安平)’이라는 자신의 이름과는 달리 정치 투쟁에 희생되는 비극적 운명을 겪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3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렸다.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대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었으며 거문고에도 능했다. 도성 북문 밖에 무이정사(武夷精舍)와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수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었고, 문인들을 초청하여 시회(詩會)를 베푸는 등 호방한 생활을 하였다. 궁중에 소장된 서화와 자신이 모은 중국 서화가들의 작품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소개하여 당대의 서화(書畫)계에 큰 역할을 하는 등 당시 문화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1430년(세종12년)에는 형 수양대군, 동생 임영대군(臨瀛大君)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여러 사람들이 그들의 뛰어난 능력을 칭송했다고 한다. 안평대군은 기질이 호탕하여 무사들을 이끌고 매 사냥을 나서기도 했으나, 그의 주변에는 주로 문인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안평대군은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한석봉과 함께 조선 최고의 명필로 불린다. 그의 글씨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의 필체를 따랐으나,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한 활달한 기풍을 담고 있다. 활달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강인한 힘이 느껴지는 높은 경지의 그의 글씨는 풍류(風流)와 문화를 알던 그의 인품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고 전해진다. 중국 사신들로부터 "조맹부에게 배웠으나 조맹부보다 훌륭하다"는 찬사를 받을 정도였고, 중국 사신들이 올 때마다 그의 필적을 얻어 갔다고 한다.
안평대군은 1450년 문종이 즉위한 뒤 황표정사(黃標政事:왕자들이 추천한 사람 가운데 왕이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를 장악하고, 측근의 문신들을 요직에 앉히는 등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했다. 하지만 더 큰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있던 수양대군은 1452년 7월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자신의 외교적 위상을 높이고 입지를 강화시켜 황표정사를 폐지해 버렸다. 이에 안평대군은 잃어버린 권력 회복에 힘쓰면서, 이징옥(李澄玉)으로 하여금 함경도 경성에 있는 무기를 서울로 옮기게 하여 무력을 기르고, 1453년(단종1년) 9월 황표정사를 다시 실시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의 힘겨루기가 본격화 된 것이었다.
하지만, 단종 즉위 이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황보인, 김종서 등 학자 세력과 제휴하여 수양대군과 권력을 다투던 중, 수양대군이 선수를 쳐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할 때, 안평대군 역시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후에 귀양지가 교동으로 옮겨지고 8일 만에 36세로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이우직도 연좌제에 의해 강화도에서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고, 아내는 관비가 되었다. 며느리인 오대(五臺)와 딸 무심(無心)은 권람의 집의 노비로 분배되었다. 이후 선원계보(왕실족보)에서도 삭제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숙종 때 복권(復權)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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