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종의 여인들- 정현왕후 윤씨
■ 성종의 여인들- 정현왕후 윤씨
폐비 윤씨가 생을 마감하자 성종은 새로운 왕비를 맞이해야 했다. 후궁 출신 중에서 선발하는 관례에 따라 숙의 윤씨가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가 바로 성종의 두번째 계비(繼妃)가 된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다. 정현왕후는 파평 윤씨 윤호(尹壕)의 딸로, 1462년 12세의 나이로 숙의(淑儀) 자리에 올랐다가 왕비가 되었다.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이 된 것이다. 이후 폐비 윤씨의 소생 연산군은 그녀를 생모로 알고 자랐고, 그녀도 원자인 연산군(燕山君)을 친아들처럼 키웠다. 정현왕후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이 훗날 중종이 되었고, 신숙공주는 일찍 죽었다. (성종은 모두 28명의 자식을 두었다.)
성종은 인정전에 나아가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을 진행했다.
『성종께서 항상 칭찬하기를 “부녀는 질투하고 시기하지 않는 사람이 적은 법인데, 현명한 왕비를 맞아들임으로써 내 마음이 편해졌다”고 하셨고, 소혜왕후(인수대비)께서도 역시 기쁨이 안색에 넘치면서 이르기를 “중궁다운 사람이 들어왔는데 낮이나 밤이나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셨다』는 <중종실록>의 기록처럼 정현왕후는 남을 배려하고 온화한 성품이 돋보이는 왕비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 시기에 그녀는 많은 수난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이 어둡고 어지러움에 미쳐서는 근심되는 마음과 애타는 생각으로 침식(寢息)이 편치 못하시어 이로 인해 병이 나셨다가 간신히 나으시기도 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1506년의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을 축출한 반정군들은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현왕후를 찾아와 그녀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중종)으로 추대하기를 고하고 승인을 받았다. 그녀는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대비로서의 정치적 간섭보다는 조용한 내조의 길을 택했다. 『깊고 원대한 계책을 잠시도 잊지 않았고, 의례적인 혜택은 조금도 베푸는 일이 없으셨다.』는 그녀에 대한 평가가 그것을 증명해 준다.
그녀는 왕실의 안정을 위해서는 단호하게 처신하기도 했다. 1527년(중종22년) 세자의 생일에 쥐의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과 귀·눈을 불로 지져 동궁의 북쪽 뜰 은행나무에 걸어놓고 세자를 저주한 ‘작서(灼鼠)의 변’이 있어났다. 언문 쪽지를 추관(推官)에게 보내 즉각 범인을 색출하도록 하고, 주모자로 경빈 박씨를 즉시 처벌하는 단호함을 보이기도 했다.
1530년(중종25년) 8월22일 69세의 나이로 경복궁 동궁의 정전에서 승하셨다. 그녀의 무덤은 남편 성종의 무덤이 있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선릉(宣陵) 왼쪽 언덕에 동원이강릉 방식으로 조성됐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