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4일 일요일

울어야 사는 여인, 곡비哭婢

■ 울어야 사는 여인, 곡비哭婢

■ 울어야 사는 여인, 곡비(哭婢)

곡비(哭婢)는 조선 시대 왕실이나 사대부집에서 상(喪)이 났을 때, 곡성(哭聲)이 끊어지지 않도록 상주를 대신하여 울어주고 삯을 받는 여성이었다. 대개 왕실의 국장(國葬)인 경우는 궁인(宮人)을, 사대부의 경우는 자기 집의 비(婢)를 시켰으나, 여의치 않을 때는 민가(民家)의 여자를 고용하기도 하였다. 요즘 예식장에서 하객 아르바이트가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곡비(哭婢)는 소쩍새가 피를 토하듯 서럽게 우는 것처럼 울어야 한다. 상가집 빈객(賓客)의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엉엉 크게 울어야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

유가(儒家)에서 전해지고 있는 예서(禮書)의 상례편(喪禮篇)에 따르면, 고인의 호흡이 멈췄을 때부터 애곡병용(哀哭倂用)하는 것을 상례의 시작으로 규정하고 있다. 애곡병용이란 부모님을 잃은 슬픔으로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서럽게 우는 것으로, 부모상과 조부모 상에는 애곡(哀哭: 아이고 아이고), 그 밖에는 어이곡(어이 어이)을 한다.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도 망자가 숨을 거두면 애곡병용하고, 시신을 묶고 싸는 소렴(小殮) 대렴(大殮:입관)까지 대곡하고 빈소에 모신 후에야 대곡을 멈추라고 했다. 입관을 마친 후 빈소가 차려지면 상주는 굴건제복(屈巾祭服)으로 갖춰 입고, 고인의 영전에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올리며 무시곡(無時哭)으로 울어야 한다고 규정(規定) 해 놓았다. 효(孝)를 중시하는 우리 조상들은 부모님이 죽음에 이르면 곧 자식이 불효를 저질러 잘 봉양하지 못한 탓이며, 따라서 자식은 천하의 불효자가 된다고 믿었다. 특히 양반으로서 체면을 중히 여기던 시절, 겉치레의 관습 때문에 부모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식음을 전폐하는 등 때로는 상주가 몸이 상하는 경우도 빈번하여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대두되자, 국가 차원에서 장례식 때 곡성 하는 방법을 법으로 규정하여 반포할 정도였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상주들은 구슬프게 우는 것이 예의였다. 겉치레가 날로 심해지고 초상집에서는 상을 마치는 날까지 곡성이 그치지 않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하지만, 장례를 치르는 집안의 여성들이 장례식장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음식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곡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곡을 전문으로 하는 곡비(哭婢)를 고용하는 것이다. 당시 곡소리의 크기와 애절함은 상가(喪家)의 위세를 판단하는 척도였으므로 체면을 세우기 위해 매우 능숙한(?) 곡비를 채용하기도 했다. 곡비는 어린 여성부터 나이든 여성까지 다양했지만, 목소리가 크고 심금을 울리는 울음소리가 낭랑한 여인들이 연습을 거듭하여 곡비로 나서게 되었다. 처량하고 구성지게 곡성(哭聲)을 잘하는 여인들은 인근 고을까지 소문이 나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도 했다.

곡비로 나서는 여인들은 대체로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돈을 받는다고 해도 장례식장에 드나들면서 억지로 우는 걸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