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4일 목요일

내시와 환관

■ 내시와 환관

■ 내시와 환관

조선시대의 내시는 남성 기능을 상실한 환관을 가리킨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내시는 성격이나 신분이 조선시대와 완전히 달랐다. 고려시대 내시는 환관이 아니었고, 성불능자도 아니었다. 고려 전기의 내시는 가문과 학식, 재능과 용모를 갖춘 엘리트 집단이었다. 과거급제나 음서(조상 덕에 특채로 관직을 받는 것)로 벼슬에 오른 문벌 집안의 아들이나 전장에 나가 군공을 세웠거나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이 내시로 발탁됐다.

내시는 왕의 최측근 시종으로 국정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왕 행차 시 동행, 왕명 초안 작성, 국가 기무관리, 유교경전 강의, 왕실 재정 담당 등의 일을 했다. 때로는 왕을 대신해서 궁궐 밖 민정을 살피는 밀명도 주어졌다.

고려시대에도 물론 거세자(去勢者)는 있었다. 환관·또는 환자라 불린 이들은 액정국에 소속돼 궁중의 잡역을 담당했다. 내시가 엘리트 집단이었던 데 반해, 환관은 대부분 노비, 무녀, 관비 소생, 특수 행정구역인 부곡 출신이었다.

내시와 환관은 전혀 다른데도 내시 하면 으레 거세된 남성을 떠올리게 된 것은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 때문이다. 원나라에서는 환관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이 같은 현상은 고려 말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자연스레 우리 조정에도 전해졌고, 왕의 신임을 받는 환관이 내시로 임명되면서 내시제도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가문이 좋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에 국한되지도 않았고, 내시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질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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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환관의 관청이 새로 설치됐는데, 그 이름이 공교롭게도 내시부였다. 이때부터 내시부 소속 환관과 ‘원조’ 내시가 혼동되기 시작했다. 결국 최고 엘리트로 지칭되던 내시는 환관의 별칭으로 둔갑하고 만다. 조선 세종 때 내시와 환관 이 용어상 혼란을 야기 시킨다는 이유로 고려의 내시를 내직(內職)으로 개칭했다. 그것도 1466년(세종 12년)에는 이를 완전히 폐지하고 그들이 하던 일을 궁궐 숙위병인 충의위와 충찬위에 맡기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사극을 보면 임금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거세한 남자 환관은 내시와 동일한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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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환관과 구별되는 고려 내시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조선의 환관제도 즉 내시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였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