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산군의 여인들 월하매
■ 연산군의 여인들 월하매
연산군은 수천 명의 ‘흥청’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를 총애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왕과 잠자리 한번 해보지 못한 흥청이 더 많았고, 한두 번의 잠자리로 끝난 흥청도 많았다. 반면 연산군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흥청도 있었는데, 원주 출신의 월하매(月下梅)가 그 경우이다.
월하매가 언제 태어났는지 확실하지 않아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연산군은 어릴 때 친모를 잃어서 생긴 모성결핍 때문인지, 특히 연상의 유부녀를 좋아했다. 연산군을 매혹시킨 장녹수도 그러하였고, 늦은 나이에 장악원(掌樂院)에 입성해 흥청까지 오른 월하매도 미루어 짐작하건대 분명 연상의 유부녀였을 것이다. 나이도 많고 미인은 아니었지만, 누이처럼 어미처럼 연산군을 품어주는 넓은 마음을 가져 연산군이 많이 의지하고 위로받았다고 한다. 또한, 비파를 타는 솜씨가 일품이라, 연산군은 종종 월하매의 비파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한다.
원주 출신의 기생 월하매는 장악원(조선시대 궁중의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의 선상기(選上妓·노래하고 춤추는 기생)로 뽑혔다가 연산군의 눈에 들어 흥청이 되었다. 실록에 따르면 월하매는 음악을 잘 이해했고 희학(戱謔)을 잘했는데, 그래서 연산군은 늘 월하매를 호방(豪放)하다고 칭찬하며 총애했다는 것이다. 희학이란 ‘희롱과 해학’의 합성어이다. 즉 월하매는 단순하게 가무만 잘한 것이 아니라 ‘희롱과 해학’도 잘했다는 뜻이다. 월하매가 남자 무당이 되어 놀이를 할 때는 신내림을 받아 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당연히 월하매는 신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어떤 말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연산군을 아이 취급하며 희롱하기도 했다. 보통 배짱을 가진 흥청이라면 감히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다. 월하매는 분명 배짱도 두둑하고 머리도 영리한 흥청이었을 것이다.
그런 월하매에게서 연산군은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위안과 행복을 느꼈음이 분명하다. 그런 월하매가 죽자 연산군은 마치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상심했다고 한다. 월하매가 병에 걸리자 연산군이 직접 문병도 하였고, 월하매가 죽자 조정 관리들에게 장례를 담당하라고 명령하고, 묘자리를 알아봐주고 제문도 지어주었다. 제사를 지낼 때는 정승들을 참석하게 하고, 직접 술도 따라주고 통곡하며 애도하는 시를 지어 바쳤다.
‘지극한 슬픔에 눈물 그치지 않고(悼極難收淚)/ 깊은 비통으로 잠 못 이루누나( 悲深睡不成)/ 어지러운 마음에 애끊는 듯하니(心紛腸似斷)/ 이제 깨어나면 어찌 살아가려나(從此覺傷生).’
이 시에는 월하매를 잃은 연산군의 비통함이 절절이 느껴진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