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미수
■ 정미수
정미수는 문종의 외손(外孫)으로 아버지는 영양위(寧陽尉)에 봉해진 정종이고, 어머니는 문종의 적녀(嫡女)인 경혜공주이다. 정미수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 정종이 세조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가 광주(光州)로 유배를 가 있던 바람에 정미수는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2살 때 외숙부 단종이 영월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으며, 곧이어 아버지 정종도 처형당했다. 7살 때인 1462년(세조 8년) 어명으로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들어왔다. 일반적으로 역신(逆臣)의 가족들은 대명률에 따라 연좌(緣坐)되어야 하나, 세조의 특명으로 경혜공주와 정미수는 연좌를 면하였고, 직위도 모두 회복하였다. 성종이 왕이 되기 전 아직 사저(私邸)에 있을 때 같은 유모인 백어리니의 손에서 자랐다. 그 인연으로 성종이 왕이 된 후, 그는 1473년(성종4년) 돈녕부직장을 거쳐 형조정랑이 되었다.
죄인의 자식이 관리가 되었다 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성종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1476년 중부참봉을 거쳐 이듬해에는 선전관이 되었고, 그 뒤 사헌부장령·충청도관찰사·도승지·공조참판·한성부판윤 등을 지냈다. 어머니인 경혜공주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당시 16세이던 정미수는 항상 약물을 먼저 맛보고 옷도 벗지 않았으며, 경혜공주의 대변을 직접 맛보는 등 병간호를 극진히 했던 효성 깊은 아들이었다고 한다.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이 되어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으며,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정미수에게는 외숙모가 되는 단종 비 정순왕후는 폐위 후 정업원에서 살다가 정미수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그래서 단종과 정순왕후의 제사도 정미수가 받들었다. 정순왕후는 정미수의 선산에 안장되었는데, 현재의 사릉(思陵)이다. 사릉은 왕비릉으로 복위되기 전까지 해주 정씨 집안에서 관리하였다. 2012년 7월 경혜공주가 정미수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내용을 담은 《경혜공주 분재기(分財記)》가 발견되었다. 해당 문서는 해주 정씨 종가(宗家)에서 소유하고 있던 문서로, 정미수가 정선방에 있는 집과 통진(지금의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집 등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는 내용이 담겨있다. 유자광에 의하면 정미수가 현덕왕후(경혜공주의 어머니)의 복권(復權)을 처음 주장했고, 남효온(南孝溫)과 김일손(金馹孫)을 사주하여 복권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1512년(중종7년) 음력 4월 15일 향년 5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는 이덕량의 딸과 혼인하였고 첩도 따로 두었으나, 자녀가 없어 7촌 조카인 정승휴로 하여금 후사를 이었다.
〈연산군 일기〉에는 정미수에 대해 "문종의 외손으로 궁중에서 자라나 호화와 사치가 습관이 되었으나, 선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청의(淸議)를 말하여, 갑자사화에서 사람들을 구하기에 힘썼다."라고 평하고 있다. 정미수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지은 강혼은 정미수에 대해 "외모가 수려하고 옥사(獄事)에 대해 논의할 때에는 매사에 깐깐하여 일의 경중을 꼼꼼히 따졌다. 형조에 있으면서 억울한 처지에 놓인 죄 없는 사람들을 살렸다." 등의 평이 남아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