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싱크탱크Think Tank 3편
■ 조선의 싱크탱크(Think Tank) 3편
유성룡은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평양성 탈환을 성공시켰고, 평양성 수복 후 이여송이 왜군과의 강화(講和) 협상에 나서자 이에 반대하고 왜군에 대한 총공세를 주장했다. 1593년 10월 다시 영의정에 오른 후에는 전쟁에 대비한 체계적인 대책 수립에 나섰다. 직업군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의 설치와 ‘전수기의십조(戰守其宜十條·전쟁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10조목)’를 올리기도 했다. 이 중에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천민의 신분을 해방하는 면천법도 포함돼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도 경기도와 충청도를 순시하면서 최일선에서 활약한 유성룡은 1599년 2월 고향 경북 안동 하회로 낙향했다. 이곳에서 쓴 <징비록>은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전황·상황에 대한 반성 등을 자세히 기록한 책으로, 끝까지 공직자의 책무를 다한 유성룡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이원익은 조선의 관료로서 최고위 직책인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지냈다. 그것도 선조·광해군·인조 3대에 걸쳐 한 정권마다 두 번씩이었다. 이원익이 여러 차례 영의정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에 있다. 선조가 평양에 있을 때 이원익은 이조판서로,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직하며 선조를 수행했다. 이원익은 평안도의 이반된 민심수습과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군량 조달에 힘을 기울였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원병 파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뛰어난 중국어 실력으로 조선의 입장을 정확히 명나라에 전했다. 이원익은 군량과 군수품 조달을 독려해 운송하도록 했고, 성벽을 수리하거나 명으로부터 화포에 관한 기술 등을 전수받았다.
이순신과의 인연도 주목된다. 이원익은 한산도에서 병력을 지휘하는 이순신을 만나 완벽한 군비 태세를 보고 잔치를 베풀어 병사들을 치하했다. 선조와 대신들이 수군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이순신을 적극 옹호해 원균을 변호하는 이산해·윤두수와 팽팽히 맞섰다. 이순신 역시 “나를 참소(讒訴:헐뜯는 말)하는 말들이 길을 메웠는데, 상국(이원익)이 오로지 나의 계책을 써주었으므로 오늘날 수군이 완전할 수 있었으니, 이것은 나의 힘이 아니고 바로 상국의 힘이었다”고 이원익에 대해 감사함을 표시했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면서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았다. 고령으로 사양하는 이원익에 대해 인조는 “누워서 장수들을 통솔해도 될 것”이라며 부탁했다. 80세가 넘어도 그는 여전히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원로(元老)였던 것이다. 그의 소박했던 삶도 널리 본보기가 되었다. ‘금천(衿川·현재의 경기 광명)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는 실록에 표현된 기록은 최후까지 청백리의 삶을 살았던 그의 모습을 잘 말해 준다.
이러한 왕의 참모들이 있었기에 조선은 위기와 전란을 극복하고 500여년의 역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도 위기와 난국을 슬기롭게 타개하고, 세계 속의 대한민국으로 거듭나게 해주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