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이 된 남자, 광해 2/4
■ 왕이 된 남자, 광해 2/4
전쟁이 끝나자, 서자출신에 장자도 아닌 둘째 아들이던 광해군의 세자로서의 역할은 축소되고 정통성 또한 취약해져 갔다. 조선 최초 방계출신 왕이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선조는 그런 광해군이 세자로서 못마땅했다. 전쟁 중 어쩔 수 없이 세자로 정하기는 했지만 기회와 명분만 있으면 세자를 바꾸려고 했다. 그래서 세자시절 광해군은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1606년(선조 39년)에 오십이 넘은 선조가 늦장가를 가 인목왕후에게서 뒤늦게 왕자(영창대군)를 얻게 되었다. 선조는 영창대군을 무척이나 총애하고 광해에 대한 핍박은 더욱 심해졌으며, 광해의 동복(同腹)형인 임해군 또한 광해군의 자리를 호심탐탐 노리고 있었다. 광해군의 반대당인 서인들은 광해군이 서자 출신임을 내세워 적장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광해군을 압박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광해군은 동인에서 분파된 대북파와 손을 잡게 된다.
어느 날, 선조는 영창대군을 무릎에 앉히고 대나무 그림을 그려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대나무 그림은 곁가지가 굵게 뻗어 있고 줄기는 아주 가늘게 그려져 있었다. 일부 눈치 빠른 벼슬아치들은 선조의 심중을 짚어 내느라 온 머리를 짜냈다.
1608년, 선조는 병이 위독하자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광해군에게 선위(禪位, 현재의 임금이 살아 있을 때 왕위를 물려주는 일)의 교서를 내렸다. 시의적절한 조치였다. 그리고 이 일을 전후해서 선조는 조정의 명망 있는 일곱 신하들을 불러들여 이른바 “영창대군의 일을 잘 부탁한다” 는 유교(遺敎)를 내렸다.
당시 광해군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던 눈치 빠른 영의정 유영경은 ‘선조의 대나무 그림에서 굵게 그린 곁가지는 광해군을, 가늘게 그린 줄기는 영창대군을 암시한 것’ 이라 생각했고, 게다가 영창대군을 부탁하는 유교(遺敎)의 뜻을 헤아려 선위의 교서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 실로 묘한 양상이 벌어진 것이다. 병석에 누워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왕을 둘러싸고 음모정치가 조정을 휘몰아 가고 있었다.
이 일이 광해군의 왕위계승을 위해 오랫동안 광해군을 보호하고 감싸던 정인홍 · 이이첨 등에 의해 누설되면서 또 한 번 조정에 큰 논란이 일게 되었다. 역사에서는 유영경 일파를 소북파, 정인홍 일파를 대북파라 한다. 정인홍은 선조에게 이 일을 알리고 앞으로의 분란을 막기 위해 유영경의 처사를 엄히 다스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 일에 대한 결말을 완전히 짓지 못하고 죽었고, 그 뒤 인목대비(영창대군의 생모)가 관례에 따라 언문 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하게 했다.
- 3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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