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이 된 남자, 광해 4/4
■ 왕이 된 남자, 광해 4/4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으로는 인목대비와 그 아비 김제남 등의 일파가 있었다. 1613년 서양갑을 중심으로 한 서자들의 옥사가 있었다. 이들은 영창대군을 추대하며 반역을 도모했는데 “참 용은 일어나지 않았는데(眞龍未起, 진룡은 영창대군을 뜻함) 거짓 여우가 먼저 울어댄다(假狐先鳴, 가호는 광해군을 뜻함)”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에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사는 집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되었고,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 등이 그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형당했다.
이듬해에는 강화부사 정항의 자의로 영창대군이 증살(蒸殺,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열기에 질식해 죽게 한 것)되었다. 이런 일을 겪게 되자 인목대비(영창대군의 생모)는 젊은 나이이지만 궁중의 어른으로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궁중에서 기회만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불평의 말을 늘어놓았다.
광해군을 원망하고 헐뜯는 인목대비의 행동거지는 이해할 만하고,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권신들은 인목대비의 일을 물고 늘어졌지만, 광해군은 이 문제만큼은 쉽사리 동의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5년 이상을 끌다가 끝내 인목대비에게서 ‘대비’라는 존호를 깎고 서궁에 유폐시키는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 제기된 것이 전은론(全恩論)이다. 부모에게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형벌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 정인홍의 주장이었고, 이원익 · 이항복 등 원로 신하들도 폐모(廢母)만은 안 된다고 극구 만류했지만, 이이첨과 허균, 개시 등의 주장으로 폐모가 단행되고 말았다.
그러나 ‘효’를 인간의 기본덕목으로 삼는 유교 이념의 사회, 성리학 국가 조선에서, 비록 생모는 아니었지만 폐모(廢母)의 조치를 내린 것은 광해군의 치명적인 실수였고 큰 잘못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 ‘폐모살제’ 는 서인에 의한 인조반정의 직접적 명분이 되었고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몰락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