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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일 화요일

왕이 된 남자, 광해 4/4

■ 왕이 된 남자, 광해 4/4

■ 왕이 된 남자, 광해 4/4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으로는 인목대비와 그 아비 김제남 등의 일파가 있었다. 1613년 서양갑을 중심으로 한 서자들의 옥사가 있었다. 이들은 영창대군을 추대하며 반역을 도모했는데 “참 용은 일어나지 않았는데(眞龍未起, 진룡은 영창대군을 뜻함) 거짓 여우가 먼저 울어댄다(假狐先鳴, 가호는 광해군을 뜻함)”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에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사는 집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되었고,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 등이 그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형당했다.

이듬해에는 강화부사 정항의 자의로 영창대군이 증살(蒸殺,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열기에 질식해 죽게 한 것)되었다. 이런 일을 겪게 되자 인목대비(영창대군의 생모)는 젊은 나이이지만 궁중의 어른으로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궁중에서 기회만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불평의 말을 늘어놓았다.

광해군을 원망하고 헐뜯는 인목대비의 행동거지는 이해할 만하고,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권신들은 인목대비의 일을 물고 늘어졌지만, 광해군은 이 문제만큼은 쉽사리 동의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5년 이상을 끌다가 끝내 인목대비에게서 ‘대비’라는 존호를 깎고 서궁에 유폐시키는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에 제기된 것이 전은론(全恩論)이다. 부모에게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형벌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 정인홍의 주장이었고, 이원익 · 이항복 등 원로 신하들도 폐모(廢母)만은 안 된다고 극구 만류했지만, 이이첨과 허균, 개시 등의 주장으로 폐모가 단행되고 말았다.

그러나 ‘효’를 인간의 기본덕목으로 삼는 유교 이념의 사회, 성리학 국가 조선에서, 비록 생모는 아니었지만 폐모(廢母)의 조치를 내린 것은 광해군의 치명적인 실수였고 큰 잘못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 ‘폐모살제’ 는 서인에 의한 인조반정의 직접적 명분이 되었고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몰락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왕이 된 남자, 광해 3/4

■ 왕이 된 남자, 광해 3/4

■ 왕이 된 남자, 광해 3/4

선조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선조의 애첩이었다가 광해군의 첩까지 된 일급참모 상궁 개시에 의해 선조가 독살 당하는 것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또 조선왕위를 승인하는 명에서도 광해군의 출신을 빌미로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데 주저하고 있었고 왕위를 이어 받은 후에도 계속 딴지를 걸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을 장악한 광해군과 대북파의 입장에서는, 자기네들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조정과 나라의 일을 제멋대로 농락하는 당파들을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왕권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왕권 확립이 최우선 과제였다.

유영경이 정계에서 쫓겨나 죽임을 당한 것도 무리한 조처는 아니었고, 광해군을 감싸던 정인홍 · 이이첨 등 대북파가 득세한 것도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정치과정이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조정의 기풍을 새롭게 하려고 했다.

당파를 따지지 않고 인재를 고루 쓰고 임진왜란으로 파탄이 난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며, 난중에 불타 버린 경복궁 등 궁궐을 새로 짓거나 손보아서 왕실의 위엄을 살리고, 조세를 고르게 하여 민생을 구제하려고 했다(대동법 실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한때 원병을 보내겠다고 까지 한 누르하치가 무서운 기세로 세력을 뻗고, 명나라는 늙은 호랑이로 쇠약해 가는 국제질서에서 한시도 눈길을 떼지 않았다.

이런 어려운 판국인데도 그의 형 임해군은 광해군의 정사를 비방하고 다녔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 또한 틈만 나면 광해군을 깎아내리려고 했다. 이들은 당인들과 결탁하여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언제나 광해군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광해군은 일단의 조치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벼슬아치들은 임해군을 추대하려다 실패하자 장자계승권을 주장, 명나라에 이 사실을 알려 압력을 넣으려고 했다. 임해군 자신은 난행(亂行)을 거듭하면서 왕위를 동생에게 빼앗겼다고 분한 마음을 먹고 있었다. 끝내 임해군은 교동도에 유배를 당했다가 사약을 받았다.

- 4편에 계속 -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왕이 된 남자, 광해 2/4

■ 왕이 된 남자, 광해 2/4

■ 왕이 된 남자, 광해 2/4

전쟁이 끝나자, 서자출신에 장자도 아닌 둘째 아들이던 광해군의 세자로서의 역할은 축소되고 정통성 또한 취약해져 갔다. 조선 최초 방계출신 왕이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선조는 그런 광해군이 세자로서 못마땅했다. 전쟁 중 어쩔 수 없이 세자로 정하기는 했지만 기회와 명분만 있으면 세자를 바꾸려고 했다. 그래서 세자시절 광해군은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1606년(선조 39년)에 오십이 넘은 선조가 늦장가를 가 인목왕후에게서 뒤늦게 왕자(영창대군)를 얻게 되었다. 선조는 영창대군을 무척이나 총애하고 광해에 대한 핍박은 더욱 심해졌으며, 광해의 동복(同腹)형인 임해군 또한 광해군의 자리를 호심탐탐 노리고 있었다. 광해군의 반대당인 서인들은 광해군이 서자 출신임을 내세워 적장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광해군을 압박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광해군은 동인에서 분파된 대북파와 손을 잡게 된다.

어느 날, 선조는 영창대군을 무릎에 앉히고 대나무 그림을 그려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대나무 그림은 곁가지가 굵게 뻗어 있고 줄기는 아주 가늘게 그려져 있었다. 일부 눈치 빠른 벼슬아치들은 선조의 심중을 짚어 내느라 온 머리를 짜냈다.

1608년, 선조는 병이 위독하자 대신들의 주장에 따라 광해군에게 선위(禪位, 현재의 임금이 살아 있을 때 왕위를 물려주는 일)의 교서를 내렸다. 시의적절한 조치였다. 그리고 이 일을 전후해서 선조는 조정의 명망 있는 일곱 신하들을 불러들여 이른바 “영창대군의 일을 잘 부탁한다” 는 유교(遺敎)를 내렸다.

당시 광해군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던 눈치 빠른 영의정 유영경은 ‘선조의 대나무 그림에서 굵게 그린 곁가지는 광해군을, 가늘게 그린 줄기는 영창대군을 암시한 것’ 이라 생각했고, 게다가 영창대군을 부탁하는 유교(遺敎)의 뜻을 헤아려 선위의 교서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 실로 묘한 양상이 벌어진 것이다. 병석에 누워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왕을 둘러싸고 음모정치가 조정을 휘몰아 가고 있었다.

이 일이 광해군의 왕위계승을 위해 오랫동안 광해군을 보호하고 감싸던 정인홍 · 이이첨 등에 의해 누설되면서 또 한 번 조정에 큰 논란이 일게 되었다. 역사에서는 유영경 일파를 소북파, 정인홍 일파를 대북파라 한다. 정인홍은 선조에게 이 일을 알리고 앞으로의 분란을 막기 위해 유영경의 처사를 엄히 다스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 일에 대한 결말을 완전히 짓지 못하고 죽었고, 그 뒤 인목대비(영창대군의 생모)가 관례에 따라 언문 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하게 했다.

- 3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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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된 남자, 광해 1/4

■ 왕이 된 남자, 광해 1/4

■ 왕이 된 남자, 광해 1/4

광해군은 조선시대 왕들 중 소설이나 드라마 ·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이고, 시대적 상황 또는 작가나 PD, 영화감독에 따라 달리 해석되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연산군과 같은 폭군의 부류로 인식되어 왔지만,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광해군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해석이 나와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 폭군 광해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광해군이 살았던 시대는 국가적으로 엄청난 위기의 시대였다. 광해군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아픔이라 할 수 있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한 생애에 다 겪었다. 임진왜란 때는 세자로서 분조(分朝)를 이끌고 직접 전장을 누볐고, 병자호란 때는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 나 강화도와 제주도에 위리 안치되어서 겪었다. 왕이 아닌 신분으로 그런 참사를 보면서 자기를 돌보는 하녀들에게 굴욕을 당하면서도 19년간을 더 살았다.

광해군은 어떻게 해서 왕위에 올랐을까?

원래 선조는 정비 소생의 아들이 없었고 후궁 출신인 공빈 김씨가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다. 따라서 장자인 임해군이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그는 무식하고 난폭한 면이 있었다. 선조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후계문제를 놓고 고심하게 된다. 다른 후궁에게서 난 많은 왕자들이 각기 왕위를 넘보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인빈 김씨는 자신의 소생인 어린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시키려는 공작을 끊임없이 벌이고 있었다. 조정과 민간의 인심은 영민한 광해군에게 쏠리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세 살 때에 죽은 처지여서 스스로 처신에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북쪽으로 쫓겨 가는 몸이 되었고, 후사를 시급히 정해야만 했다.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일단 세자책봉 문제는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광해군은 세자로서 분조(分朝, 임시로 세자에게 임금의 일을 대행하게 하는 제도)를 맡아 전란(戰亂) 중에 동분서주하며 그 소임을 다했고, 조정과 백성들의 명망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광해군의 왕위계승은 요지부동할 것 같았고 그 자신 또한 현군의 자질을 키워 나갔다.

- 2편에 계속 -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