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종의 여인들, 단의왕후 2편
■ 경종의 여인들, 단의왕후 2편
단의왕후가 5세 때이던 어느 여름날, 아버지 심호가 술에 취해 낮잠을 자면서 딸에게 부채를 들고 파리를 쫓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저녁때가 되도록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그래서 심호는 그 딸을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항상 가인(家人)들에게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천성이 간소한 것을 좋아하여 남이 좋은 옷을 입더라도 부러워하지 않았으며, 좋은 것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여러 동생들에게 모두 나누어주는 등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고 한다. 세자비가 되어서도 숙종에게 좋은 며느리였으며, 어진 성품과 총명과 덕을 고루 갖추었다. 남편인 세자(경종)에게도 좋은 각시였다. 오죽하면 그녀가 죽었을 때 왕세자인 남편이 스스로 지문을 지었겠는가?
혜릉은 조선 20대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처음 왕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以前의 순회세자묘(순창원)와 소현세자묘(소경원)의 예를 참조하여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단의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 하였고, 1722년(경종 2년)에 능의 형식에 맞게 무석인(武石人), 난간석(欄干石), 망주석(望柱石) 등 석물(石物)을 추가로 제작하였다.
능침의 석물은 명릉(明陵: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이후의 양식을 그대로 따라 작게 조각하였다. 단의왕후 신씨는 세자빈 신분으로 죽은 후에 원(園)에서 능(陵)으로 승격되어 조성된 탓인지 능역 들어가는 입구가 다른 능보다 초라한 느낌이다. 그래서 혜릉(惠陵)은 능호처럼 전체적으로 소박한 느낌이다. 혜릉의 석물 역시 명릉(明陵)의 영향으로 실물과 거의 비슷한 크기로 조성하였다.
단의왕후 심씨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더구나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도 전 세자빈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남기지 못했다. 단의왕후의 혜릉은 경종과 함께 묻히지 못했다는 점에서 쓸쓸함과 함께 아련함이 묻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동구릉 내 장렬왕후 조 씨의 ‘휘릉’과 유사하지만, 인조에게 버림받은 장렬왕후 조씨에 비하면, 단의왕후 심씨는 경종과 숙종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한편 그녀의 친정가문은 경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몰락하게 되는데, 영조가 즉위한 뒤 ‘경종독살설’이 유포되고, 이에 호응해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그녀의 친정가문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종은 왕세자 시절인 1696년 9세에 단의왕후 심씨와 혼인하고, 단의왕후 사망 후인 1718년 31세의 나이로 선의왕후 어씨와 다시 혼인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도 자녀를 한 명도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1721년 당시 경종의 나이가 34세, 선의왕후가 17세였던 점을 고려하면 연잉군 세자 책봉은 경종 입장에서 매우 무례한 요구였다.
경종은 대신들을 불러 의견을 구했는데 공교롭게도 당시 모인 대신 모두가 노론이었다. 이들이 당연히 세자 책봉을 적극 찬성하자 경종은 어쩔 수 없이 연잉군의 세제(世弟) 책봉을 허락했고, 경종 사후 영조는 왕위에 올랐다. 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