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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2일 금요일

경종의 여인들, 선의왕후 2편

■ 경종의 여인들, 선의왕후 2편

■ 경종의 여인들, 선의왕후 2편

선의왕후는 시동생인 영조와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영조 즉위 초부터 선의왕후는 남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영조를 위한 예식과 절차를 거부하기 일쑤였고, 영조는 왕대비(선의왕후)에게 올려지는 물품을 매번 삭감(削減)하여 국고나 백성에게 돌렸다. "왕대비(선의왕후)에게 진연(進宴:잔치)을 올리자."는 홍치중의 주청이 있자, 영조가 진노했다고 한다. 뒤이어 종실 전성군 이혼 등 종친부가 일제히 상소하여 진연 올리기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조는 "나의 성의가 부족한 것 때문에 (선의왕후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책임을 회피하였고, 이후 진연을 올리는 것이 정해지기는 하였지만 수차례 연기되었다. 심지어 영조는 선의왕후의 국상 기간 중에 후궁 귀인 이씨를 내명부 정1품 빈(嬪)으로 삼고 대대적인 잔치를 열어 도성 안팎은 물론 노론 대신들까지 탄식을 쏟아낼 정도였다.

선의왕후를 죽음으로 이끈 병명은 밝혀지진 않았으나, 실록에서 왕후가 죽기 전날의 기록을 보면 죽기 직전까지 몸을 떨며 통곡을 하고 읍성(눈물을 흘리며 우는 소리)을 냈다고 한다. 또한 손으로 뭔가를 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영조가 의관들에게 그러한 증후를 본 적이 있는지 묻자 중관(中官:내시)이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고 한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선의왕후가 사망한 것은 오랜 지병을 앓아서가 아니라 1730년 4월 15일에 발생했던 영조 암살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어조당에 유폐되었고, 분개한 선의왕후가 음식을 거부하여 끝내 아사(餓死)한 것이라고 전한다. 선의왕후가 이인좌 등에게 비밀리에 언문교서를 내렸는데 "왕실의 씨가 바뀌었으니 바로 잡아라."는 하교를 내렸다고 전한다.

사실 여부는 실록에 존재하지 않으나, 이인좌 등이 왕대비의 밀명을 받았다고 주장한 흔적은 영조실록에 수차례 등장한다.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가 사망한 것에 대해도 선의왕후가 독살 하였다는 설과 궁녀를 시켜 독살한 것이란 설이 존재한다.

영조 6년 (1730년) 6월29일 승하하시어 10월19일 경종의 능하(陵下:왕의 아래)에 부장(附葬:왕릉 가까이 묻음) 하였으니 그 해 나이 26세였다. 시호(諡號)는 선의(宣懿)라 하고, 휘호(徽號)를 효인혜목(孝仁惠穆)이라 하였다. 매사에 정숙하고 온유하였으나 경종과의 사이에 소생은 없었다.

능호는 의릉(懿陵)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의릉은 쌍릉이지만 다른 왕릉과 약간 다른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조성하지만 이 무덤은 앞·뒤로 무덤을 조성한 상하이봉릉(上下異封陵)이다. 이처럼 앞·뒤로 만든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으로 효종과 인선왕후의 무덤인 영릉에서 처음 나타났다.

왕릉에는 무덤 둘레에 병 풍석을 세우지 않고 대신 무덤 주위에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했는데,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간지가 방위에 따라 문자로 새겨져 있다. 난간석 밖으로 망주석·장명등·문무석과 말·양·호랑이가 있다. 무덤의 석물 배치와 양식은 명릉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를 택하였다. 왕비릉의 석물 배치는 왕릉과 같으나 무덤 뒤에 담을 두르지 않았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