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의 요리사, 숙수 3편
■ 왕의 요리사, 숙수 3편
조선의 수라간은 은밀한 공간이었으며 철저하게 통제된 공간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오랫동안 조선의 정궁이었던 창덕궁, 왕비가 거처하는 대조전(大造殿) 바로 곁에 작은 수라간이 있었다. 대조전 수라간은 지금도 남아있는데, 아쉽게 온전한 조선시대의 모습은 아니다. 창덕궁 수라간은 1920년대 현대식 부엌으로 개축되었고, 당시 사용했던 일제 오븐과 당시 쓰던 찬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수라간은 대전과 왕비전 등 궁궐 곳곳에 위치했다. 이곳에 종사하는 인원은 400여 명. 밥을 짓는 반공, 생선을 굽는 적색, 술을 빚는 주색, 떡을 만드는 병공 등 한 사람이 평생 한 가지 일에만 종사했다. 왕의 요리사는 철저하게 분업화 되어있었고, 전문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임금의 수라를 책임지는 업무를 맡은 기구는 이조(吏曹) 산하의 사옹원(司饔院)이었다. 사옹원에서 대전, 왕비전, 세자전의 모든 수라를 책임졌고, 특히 임금의 수라는 사옹원이 중심이 돼서 내시부와 내명부도 함께 참여했다. 수라를 맡은 최고 책임자는 종2춤의 상선내시였다. 그 아래 술과 차를 맡았던 상온과 상다가 있었고, 사옹원 총책임자인 제거가 그 밑에 있었다. 또, 조리사는 종9품, 그들 아래 별사옹을 비롯한 각 색장들이 실제 요리를 맡았으며, 이들 모두가 남자들이었다.
실록에는 숙수가 되는 것을 꺼리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왜 궁중 요리사가 되는 것을 기피했을까? 왕의 수라는 식재료 준비부터 숯불을 일구는 문제, 양념을 하는 문제까지 세심하고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고, 여러 단계를 거쳐 완성되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 많았다. 궁궐 안에 배치된 요리사들은 하루에 2교대로 궁중음식을 담당했다. 특히, 대령숙수는 항상 밤에도 대기하며 음식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고, 요리사들도 대기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왕은 하루에 다섯 번 수라를 들었다. 고된 노동 때문에 숙수를 기피하자, 이들을 붙들어두기 위해 노비의 신분을 면천해주거나 역을 감면해주기도 했다.
엄청난 노동 강도와 국가의 공식적인 업무라는 점, 그리고 유교국가라는 조선의 특수성, 이로 인해 ‘숙수’라는 직업은 남성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왕의 신변 보호 문제도 있었다. 상선내시와 수라간의 총책임자들은 당연히 임금을 가장 잘 보필할 수 있는 정치적 측근이었을 것이다. 정적(政敵) 세력에게 임금의 음식을 맡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왕의 신변보호에는 일선 요리사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임금의 음식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약이 되는 것이어야 했다. 이에 임금의 체질과 질병, 계절과 몸 상태에 따라 효능 있는 음식을 바치는 ‘식치(食治)’를 할 수 있었다. 식치를 위해서는 요리사들의 기초 의학 상식은 필수였으므로 이런 공부를 제대로 하기에는 여성보다는 남성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