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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9일 화요일

왕의 요리사, 숙수 4편

■ 왕의 요리사, 숙수 4편

■ 왕의 요리사, 숙수 4편

궁궐에서는 수백 명의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솥 같은 주방 용품도 크고 무거웠다. 또 하루에 보통 두 끼만 먹는 일반인들에 비해 왕실은 훨씬 더 자주 식사를 했기 때문에, 궁궐 주방에서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음식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래서 숙수의 일은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사옹원은 노동력 확보에 늘 골머리를 앓았다. 궁궐 주방을 기피하는 남자 숙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 궁궐 주방에서 근무하다가도 중노동을 못 견디고 도망가는 숙수도 많았다. 그래서 숙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일은 사옹원의 핵심 과제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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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때 ‘말손’ 이라는 숙수가 있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그는 팀장급 셰프였다. 그의 신분은 노비가 아닌 양인이었다. 중종 7년 3월 16일(1512년 4월 2일) <중종실록>에 따르면, 말손은 궁궐 주방 일이 너무나 힘들어 어느 날부터 궁궐에 출근하지 않았고, 그런 날이 5개월이나 계속됐다. 반년 가까이 무단결근을 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런 일은 매우 흔했다. 힘들다고 도망가는 숙수가 많았기 때문에 말손처럼 무단결근하는 것은 어찌 보면 소극적 저항인 셈이었다. 그런데 사옹원 책임자인 사옹원 제조는 특단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말손에 대한 중징계를 내리기로 했다. 주로 왕족이나 사대부 중에서 임명되는 사옹원 제조들은 숙수들의 고충을 잘 몰랐다. 그는 말손을 단단히 혼내줌으로써 일벌백계의 효과를 거두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법에도 없는 징계를 내렸다. 양인 신분인 말손을 사옹원 노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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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손은 5개월씩이나 무단결근할 정도로 배짱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사옹원 제조의 불법 징계를 고분고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는 정부에 사옹원 제조의 징계가 불법적이고 부당하니 취소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징계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한 셈이었다. 이 탄원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는 중종 임금이었다. 신하들은 말손에 대한 징계가 법에도 없는 것이고 너무 과하다고 하면서 징계 철회를 주장했다. 하지만, 중종의 생각은 좀 달랐다. 징계가 위법한 것은 사실이지만, 숙수들의 근무 행태를 고쳐놓으려면 이참에 본때를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중종은 말손의 아내가 제기한 탄원을 기각했다. 이로써 말손은 사옹원 노비가 되어 죽을 때까지 궁궐 주방에서 일하게 됐다고 한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왕의 요리사, 숙수 3편

■ 왕의 요리사, 숙수 3편

■ 왕의 요리사, 숙수 3편

조선의 수라간은 은밀한 공간이었으며 철저하게 통제된 공간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오랫동안 조선의 정궁이었던 창덕궁, 왕비가 거처하는 대조전(大造殿) 바로 곁에 작은 수라간이 있었다. 대조전 수라간은 지금도 남아있는데, 아쉽게 온전한 조선시대의 모습은 아니다. 창덕궁 수라간은 1920년대 현대식 부엌으로 개축되었고, 당시 사용했던 일제 오븐과 당시 쓰던 찬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수라간은 대전과 왕비전 등 궁궐 곳곳에 위치했다. 이곳에 종사하는 인원은 400여 명. 밥을 짓는 반공, 생선을 굽는 적색, 술을 빚는 주색, 떡을 만드는 병공 등 한 사람이 평생 한 가지 일에만 종사했다. 왕의 요리사는 철저하게 분업화 되어있었고, 전문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임금의 수라를 책임지는 업무를 맡은 기구는 이조(吏曹) 산하의 사옹원(司饔院)이었다. 사옹원에서 대전, 왕비전, 세자전의 모든 수라를 책임졌고, 특히 임금의 수라는 사옹원이 중심이 돼서 내시부와 내명부도 함께 참여했다. 수라를 맡은 최고 책임자는 종2춤의 상선내시였다. 그 아래 술과 차를 맡았던 상온과 상다가 있었고, 사옹원 총책임자인 제거가 그 밑에 있었다. 또, 조리사는 종9품, 그들 아래 별사옹을 비롯한 각 색장들이 실제 요리를 맡았으며, 이들 모두가 남자들이었다.

실록에는 숙수가 되는 것을 꺼리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왜 궁중 요리사가 되는 것을 기피했을까? 왕의 수라는 식재료 준비부터 숯불을 일구는 문제, 양념을 하는 문제까지 세심하고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고, 여러 단계를 거쳐 완성되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 많았다. 궁궐 안에 배치된 요리사들은 하루에 2교대로 궁중음식을 담당했다. 특히, 대령숙수는 항상 밤에도 대기하며 음식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고, 요리사들도 대기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왕은 하루에 다섯 번 수라를 들었다. 고된 노동 때문에 숙수를 기피하자, 이들을 붙들어두기 위해 노비의 신분을 면천해주거나 역을 감면해주기도 했다.

엄청난 노동 강도와 국가의 공식적인 업무라는 점, 그리고 유교국가라는 조선의 특수성, 이로 인해 ‘숙수’라는 직업은 남성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왕의 신변 보호 문제도 있었다. 상선내시와 수라간의 총책임자들은 당연히 임금을 가장 잘 보필할 수 있는 정치적 측근이었을 것이다. 정적(政敵) 세력에게 임금의 음식을 맡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왕의 신변보호에는 일선 요리사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임금의 음식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약이 되는 것이어야 했다. 이에 임금의 체질과 질병, 계절과 몸 상태에 따라 효능 있는 음식을 바치는 ‘식치(食治)’를 할 수 있었다. 식치를 위해서는 요리사들의 기초 의학 상식은 필수였으므로 이런 공부를 제대로 하기에는 여성보다는 남성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2024년 4월 8일 월요일

왕의 요리사, 숙수 1편

■ 왕의 요리사, 숙수 1편

■ 왕의 요리사, 숙수 1편

최근에는 요리를 소재로 하는 TV프로그램이 많다. 가정에서 요리를 주로 하는 사람은 분명 여성이고, 예로부터 우리는 어머니의 손맛을 최고로 여겨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요즘은 남자 요리사가 대세이다. 요즘 소위 맛집으로 유명한 음식점이나 고급 레스토랑의 주방은 남자요리사로 가득 차 있다. ‘요섹남’이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요리 잘하는 남자’는 요즘 여성들에게 매력적이고 인기도 많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남자요리사가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유교이념이 지배하는 조선시대에 남자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광경은 상상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숙수’라고 불리우는 남자 궁중요리사들이 존재했다. 조선시대의 풍속화로 어느 고관댁의 잔칫날 풍경을 생생하게 그린 그림이 있다. 음식준비로 바쁜 부엌에 재료를 나르고 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드는 남자들이 가득하다. 고관의 명으로 출장 나온 궁중요리사들인 것이다.

조선시대 존엄한 존재였던 임금님의 안녕과 건강은 국가의 운명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임금님의 안녕과 건강의 근본은 음식, 즉 수라(水刺)였다. 일반적으로 궁녀와 나인, 상궁들이 만들었을 거라는 인식과 달리 왕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 조선 수라간의 주역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대장금’이라는 드라마에는 수라간에서 요리하는 나인과 상궁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하지만 실제로 진귀한 왕실 요리를 만들어 내는 수라간에는 고기요리, 찜요리, 채소요리 등 각각의 분야에 전문가들인 남자 요리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궁중의 요리사들은 까다로운 레시피의 궁중요리 수백 가지를 재래식 요리도구를 이용해 준비해야했다. 또, 왕이 원하면 언제라도 요리를 대령할 수 있도록 24시간 상시 대기해야했고, 때로는 고관들의 집에 불려가 출장요리를 하기도 했다. 이들의 신분은 관노(官奴)였다. 열심히 일한 대가로 상을 받거나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지만, 왕실의 잔치와 제사는 끝이 없었기 때문에 그만큼 조선시대 왕실 요리사들은 모두가 기피할 정도로 고된 직업 중 하나였다고 한다. 게다가 행여 음식에 문제라도 생기면 처벌을 면치 못했다.

1903년, 왕의 수라에 관한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다. 홍합을 먹은 고종의 이가 부러진 것이다. 요리의 책임자로 ‘숙수 김원근(金元根), 사환 김만춘(金萬春), 숙수패장 김완성(金完成), 각감 서윤택(徐潤宅)’ 등이 처벌을 받았다. 모두 남자였다. 이렇듯 수라간의 주역은 남자였다. 그렇다면 그 많은 나인과 상궁들은 무엇을 했을까. 기미상궁은 임금의 수라에 이상이 있는지를 확인하며 맛보는 역할을 했고, 나인들은 수라간에서 대전 혹은 침전으로 음식을 나르거나 식재료 운반, 설거지 등 요리사들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았다. 수라상궁들은 이런 나인들을 지휘하고 감독하며 수라간 일을 주재했지만 직접 요리를 하지는 않았다. 임금님의 음식은 남자가 만들었던 것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