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1편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1편
유관순열사는 190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류중권(柳重權)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고, 공주 영명학당에서 수학(受學)하다 1916년 미국인 여성 감리교회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학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고, 집이 멀었던 유관순열사도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뜨개질을 좋아하고 장난기 많던 소녀였다고 한다. 서대문형무소 기록에 따르면 5자 6치, 요즘 단위로 환산하면 169.7cm다. 당시 여학생 평균키는 150cm였으니 상당히 큰 체격이라고 할 수 있다.
"유관순열사가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장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와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고,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인 류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그것이 3.1 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1919년 양력 4월 1일, 음력 3월 1일)이다. 유관순 열사 부모도 일본군이 휘두른 칼에 학살됐고, 유관순 열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 형문소로 끌려갔다.
",공주재판소 법정에서 "나는 조선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들은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말했다. 일본인 검사가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독립이냐"고 하자, 유관순 열사는 검사에게 의자를 던졌다고 한다. 감옥에서도 여러 번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그때마다 심한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았다. 징역 3년형을 받았으나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형으로 늘어나고, 교도소 안에서도 시위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일제의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결국 옥사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