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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4일 목요일

3·1운동의 상징, 유관순열사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열사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열사

3·1운동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이 바로 유관순 열사이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생으로, 1916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5일 만세 시위에 참가한 뒤, 총독부의 임시 휴교령이 내려지자 3월 8일 고향으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4월1일 아우내장터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시위가 시작되자, 그녀는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시위 도중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주동자로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3년형을 언도받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유관순의 마음은 불타올랐다.

17살의 소녀 유관순은 재판장에게 자신의 투쟁이 정당함을 역설하고 의자를 집어 던지는 의지까지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법정은 모욕죄까지 가산하여 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당시 민족대표들이 받은 형량에 비하면 중형이었다.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도 틈만 나면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그 때마다 갖은 고문을 받았고,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 때에는 가장 열심히 만세를 불러 많은 독립지사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다시 끌려가 복막이 터지는 등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심한 갖은 고문을 당했고, 결국 그해 10월 12일 18살의 어린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화학당 교장은 서대문형무소 당국에 시신 인도를 요구했으나 일제는 거부했고, 이에 교장이 이 사실을 국제 언론에 알리겠다고 하자 마지못해 일제는 석유통 하나를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교장이 석유통을 열어보니 그곳엔 유관순의 시신이 토막 나 들어 있었다고 한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

2024년 3월 11일 월요일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2편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2편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2편

옥사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지만 일제는 고문 사실이 드러날까봐 인도를 거부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이화 학당의 프라이 교장은 국제 여론에 호소하며 시신 인도를 요구한 끝에 그 시신을 넘겨받았다. 그렇게 돌아온 시신은 아주 끔찍했다. 손톱과 발톱은 모두 다 뽑혀져 있었고, 코와 귀가 잘려 나가고 머리카락이 가죽째 뽑혀져 있었다고 한다. 두 팔과 두다리와 머리와 몸통이 따로따로 잘려져 여섯 토막으로 나눠져 있었다고 하니 그 끔찍함에 소름이 돋는다.

10월 12일 시신을 넘겨받아 이틀 뒤 서울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고,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무덤에서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도시계획에 의한 일제의 공사로 이태원 공동묘지의 유골을 미아리로 이장하면서 유골이 없어지게 되는데, 이후 열사의 유골은 찾지 못하고 말았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열사의 유언이다.

삼일운동은 일본의 가혹한 무단 통치 아래서도 꺾이지 않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국내외에 떨쳤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에게 우리나라 국권 회복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조직적인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의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민주 정부가 수립되어 독립 운동의 중추 기관으로 활약하게 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일본으로 하여금 식민 통치 방법을 무단 통치에서 문화 정치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삼일절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국가 기념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3·1운동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인 의의 때문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밝히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일제의 철통같은 무단통치를 뚫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이고 열정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분명한 거부였다. 비록 3·1운동을 통해 일제 식민 통치를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3·1운동은 비로소 한국 민족을 문화적, 역사적 민족 개념에 기반한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한국 민족 개개인에게 뿌리내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1편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1편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1편

유관순열사는 190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류중권(柳重權)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고, 공주 영명학당에서 수학(受學)하다 1916년 미국인 여성 감리교회 선교사 사애리시(史愛理施)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학했다. 당시 이화학당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고, 집이 멀었던 유관순열사도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게 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뜨개질을 좋아하고 장난기 많던 소녀였다고 한다. 서대문형무소 기록에 따르면 5자 6치, 요즘 단위로 환산하면 169.7cm다. 당시 여학생 평균키는 150cm였으니 상당히 큰 체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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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열사가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장 룰루 프라이는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와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고,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 여파로 1919년 3월 10일에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지자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인 류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그것이 3.1 운동 중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1919년 양력 4월 1일, 음력 3월 1일)이다. 유관순 열사 부모도 일본군이 휘두른 칼에 학살됐고, 유관순 열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 형문소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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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재판소 법정에서 "나는 조선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들은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말했다. 일본인 검사가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독립이냐"고 하자, 유관순 열사는 검사에게 의자를 던졌다고 한다. 감옥에서도 여러 번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그때마다 심한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았다. 징역 3년형을 받았으나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형으로 늘어나고, 교도소 안에서도 시위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일제의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결국 옥사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