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2편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 2편
옥사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지만 일제는 고문 사실이 드러날까봐 인도를 거부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이화 학당의 프라이 교장은 국제 여론에 호소하며 시신 인도를 요구한 끝에 그 시신을 넘겨받았다. 그렇게 돌아온 시신은 아주 끔찍했다. 손톱과 발톱은 모두 다 뽑혀져 있었고, 코와 귀가 잘려 나가고 머리카락이 가죽째 뽑혀져 있었다고 한다. 두 팔과 두다리와 머리와 몸통이 따로따로 잘려져 여섯 토막으로 나눠져 있었다고 하니 그 끔찍함에 소름이 돋는다.
10월 12일 시신을 넘겨받아 이틀 뒤 서울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고,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무덤에서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도시계획에 의한 일제의 공사로 이태원 공동묘지의 유골을 미아리로 이장하면서 유골이 없어지게 되는데, 이후 열사의 유골은 찾지 못하고 말았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열사의 유언이다.
삼일운동은 일본의 가혹한 무단 통치 아래서도 꺾이지 않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국내외에 떨쳤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에게 우리나라 국권 회복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조직적인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의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민주 정부가 수립되어 독립 운동의 중추 기관으로 활약하게 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일본으로 하여금 식민 통치 방법을 무단 통치에서 문화 정치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삼일절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국가 기념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3·1운동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인 의의 때문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밝히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일제의 철통같은 무단통치를 뚫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이고 열정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분명한 거부였다. 비록 3·1운동을 통해 일제 식민 통치를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3·1운동은 비로소 한국 민족을 문화적, 역사적 민족 개념에 기반한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한국 민족 개개인에게 뿌리내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