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의 상징, 유관순열사
■ 3·1운동의 상징, 유관순열사
3·1운동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이 바로 유관순 열사이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생으로, 1916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5일 만세 시위에 참가한 뒤, 총독부의 임시 휴교령이 내려지자 3월 8일 고향으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4월1일 아우내장터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시위가 시작되자, 그녀는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시위 도중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자신은 주동자로 잡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3년형을 언도받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유관순의 마음은 불타올랐다.
17살의 소녀 유관순은 재판장에게 자신의 투쟁이 정당함을 역설하고 의자를 집어 던지는 의지까지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법정은 모욕죄까지 가산하여 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당시 민족대표들이 받은 형량에 비하면 중형이었다.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도 틈만 나면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그 때마다 갖은 고문을 받았고,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 때에는 가장 열심히 만세를 불러 많은 독립지사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다시 끌려가 복막이 터지는 등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심한 갖은 고문을 당했고, 결국 그해 10월 12일 18살의 어린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화학당 교장은 서대문형무소 당국에 시신 인도를 요구했으나 일제는 거부했고, 이에 교장이 이 사실을 국제 언론에 알리겠다고 하자 마지못해 일제는 석유통 하나를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교장이 석유통을 열어보니 그곳엔 유관순의 시신이 토막 나 들어 있었다고 한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