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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일 월요일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1편

■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1편

■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1편

1400년 태종 때의 일이었다. 영남지방의 큰 가뭄으로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관청에 소속된 한 노비가 강에서 물을 끌어 올려 논에 물을 대는 장치를 만들었다. 이 장치로 가뭄을 이겨낸 현감은 이 관노에게 큰 상을 내렸다. 이 관노가 바로 장영실(蔣英實)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번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장영실은 미천한 신분을 딛고 일어선 최고의 발명가였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장영실을 궁궐로 처음 부른 사람은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다. 태종은 각 지방을 다스리는 관찰사가 추천한 지방의 우수한 인재들을 한양으로 불러들여 일하게 하는 ‘도천법(道薦法)’을 시행했다. 태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추천하게 했다. 동래현의 관노였던 장영실이 한양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이 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1423년 평소 손재주가 좋은 장영실을 눈여겨 보고 있던 공조 참판 이천은 세종에게 장영실의 기술과 재주를 추천하였고, 세종은 장영실의 실력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세종은 관노에게 벼슬을 줄 수 없다는 신하들을 달래 장영실에게 벼슬을 주었다. 장영실은 세종의 뜻에 감사하며 과학 연구와 발명에 온 힘을 쏟았다. 뛰어난 재주와 능력을 인정받아 노비의 신분을 벗고 종3품의 벼슬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정작 그의 생몰(生沒:탄생과 죽음)은 물론, 성장 과정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장영실의 출신 성분 때문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장영실의 조상은 원나라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에 귀화하여 아산군(牙山君)에 봉해졌던 장서(蔣壻)의 9대손이며, 그의 집안은 고려 때부터 대대로 과학기술분야의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부친은 고려 말 전서라는 직책을 지낸 장성휘이며, 모친은 관기(官妓)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는 노비가 아니었지만 장영실이 관노인 이유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조선시대의 신분제도 때문이다. 조선시대 관기(官妓)들은 신분상 천민에 해당하여 딸을 낳으면 어머니를 따라 관기(官妓)가 되었고, 아들을 낳으면 관노(官奴)가 되었다.

태조에서 세종대까지 조선은 귀화인들의 정착을 위해 조선 여자와의 혼인을 주선하였는데, 귀화인들과 혼인한 여성들은 대체로 관노 출신들이 많았다. 그러나 한족(漢族)같은 출신 배경이 좋은 귀화인들은 대체로 양인 여성과 혼인하였으므로, 장영실의 모친은 정실부인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크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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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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