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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일 월요일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3편

■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3편

■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3편

세종은 자동 물시계를 만들어 궁궐에 설치하고 싶었다. 장영실은 자신의 재주를 높이 사 면천(免賤)에다가 관직까지 내려준 세종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그 꿈을 이루고자 했다. 장영실은 당시 세종과 정인지, 정초 등이 조사하고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문헌에 전하는 소송의 물시계와 이슬람의 물시계를 비교하면서 ‘자격루(自擊漏)’라고 하는 새로운 자동 물시계를 만들어냈다. 자격루는 물을 넣은 항아리의 한쪽에 구멍을 뚫어 물이 일정하게 흘러나오게 만든 것으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의 양을 이용해 각각 시(時)·경(更)·점(點)에 따라 종·북·징이 울리거나 시패(時牌)를 든 인형이 나타나 시간을 알려주는 일종의 자동시간알림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자격루는 세종 16년 경복궁 경회루 남쪽에 있는 보루각(報漏閣)에 세워졌는데, 세종 때 만든 이 자격루는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덕수궁에 있는 것은 1536년(중종31년)에 장영실이 만든 것을 개량한 것이다. 장영실은 1438년 세종에 대한 보은의 뜻으로 자격루보다 더 정교한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만들었다. 임금을 위한 궁중 물시계인 셈이다.

또한 농사를 과학적으로 짓기 위한 노력도 빠질 수 없다. 그동안 빗물이 땅에 스며든 깊이로 비의 양을 쟀으나, 땅의 성질이나 위치에 따라 다 달라 정확하지가 않았다. 마침내 1441년 장영실은 물통에 떨어지는 빗물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빗물의 양을 재는 측우기를 만들었다. 측우기는 벽돌 모양의 돌기둥에 쇠로 만든 원통을 얹은 간단한 형태였지만, 비의 양을 효과적으로 정확하게 잴 수 있는 과학적인 기구였다. 원통형의 측우기 안에 빗물이 고이면 주척(周尺)이라 부르는 자로 측우기에 고인 물을 재서 강수량을 측정했다. 우리나라 측우기는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 발명된 것이다.

하지만, 측우기를 처음 생각해내고 주도한 인물은 문종이라는 설(說)도 있다. 물론 문종이 측우기를 실험하고 제작하는 과정에서 장영실 등 과학기술자의 도움을 받았겠지만, 측우기 발명의 원조는 문종이라는 것이다.

장영실이 약 53세였던 1442년 3월(세종24년), 세종이 온천욕을 위해 이천을 다녀오던 중 어가(御駕)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장영실이 기술자로서 그 책임이 있다 하여,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곤장 100대와 파직(罷職)을 구형했다. 이때 그토록 총애하던 장영실을 위해서 세종이 해주었던 것은 100대 맞을 것을 80대로 깍아 준 것뿐 이라하니 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사건은 세종의 비대한 몸무게를 감안하지 않은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대신들의 눈치를 본 것일까, 아니면 결국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일까. 아쉬움이 드는 부분이다. 조선의 위대한 과학자 장영실은 이후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삼사(三司)의 건의로 사형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장영실은 이순지·이천 등과 함께 조선 전기 최고의 과학자로 지금도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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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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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2편

■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2편

■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2편

조선은 정책적으로 농사를 장려하는 농본정책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가 정책에 힘입어 특히 세종대에는 집현전 학사들과 장영실을 중심으로 과학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방법과 농업 기술을 연구하였고, 농사를 과학적으로 지을 수 있게 해주는 많은 과학 기구가 발명되었다. 장영실은 1421년(세종3년)에 윤사웅·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다. 이후 세종의 총애를 받아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가 되면서 관노의 신분을 벗게 되었고, 궁중기술자로 활약하게 된다. 상의원(尙衣院)은 왕의 의복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는데, 별좌는 종5품의 문반직이었다. 월급은 없는 무록관(無祿官)이었고,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현감 정도의 지위였다.

세종의 배려(配慮)로 궁중 기술자가 된 장영실은 얼마 뒤 별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이를 기록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라는 명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별을 살피는 기구만큼은 중국보다 앞서 있다. 그러니 이를 잘 활용하면 더 훌륭한 기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세종의 명을 받고 정인지, 정초, 이천 등의 학자들과 함께 새로운 관측기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몇 번의 실패를 거쳐 1433년쯤 마침내 천체의 위치나 움직임 등을 살피고 기록하는 기구인 간의와 혼천의를 만들어냈다. 세종은 그 뛰어난 성능에 탄복하며 간의대를 설치하고, 그 곳에 이 기구들을 두어 세자들에게 해와 달, 별 등이 움직이는 이치를 배우게 했다.

뒤이어, 세종의 명령으로 장영실이 만든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지구를 반으로 자른 듯 한 솥 모양의 청동으로 만든 해시계이다. 그 속에 침을 세워 놓아 그림자의 길이에 따라 절기를 재고, 그림자 끝의 위치에 따라 시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이 해시계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사람이 많이 오가는 큰길가인 종묘 앞에 세워 놓았다. 특히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시간 옆에는 쥐, 소, 호랑이, 말 등의 동물을 그려 놓아 쉽게 시간을 알 수 있게 했으니, 정말로 백성을 생각하는 세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해시계는 밤이나 흐리고 비가 오면 시간을 알 수가 없는 단점이 있었다.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것이 물시계이다. 물시계는 중국에서 기원전 7세기에 발명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매일 물을 갈아주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고 항상 사람을 시켜서 시간을 재어야 했다. 이를 게을리 하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었고, 시간이 안 맞아 큰 소동이 일어나는 게 다반사였다. 그래서 사람이 일일이 물을 갈아주지 않아도 자동으로 움직이는 물시계를 만들고자 하는 바램으로 중국 송나라의 과학자 소송(蘇訟)이 결국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장치들이 어찌나 복잡한지 소송이 죽은 뒤에는 아무도 그것을 다시 만들지 못해 곧 사라지고 말았다. 12~13세기에는 아라비아 사람에 의해 쇠로 만든 공이 굴러 떨어지면서 종과 북을 쳐서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자동 물시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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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1편

■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1편

■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1편

1400년 태종 때의 일이었다. 영남지방의 큰 가뭄으로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관청에 소속된 한 노비가 강에서 물을 끌어 올려 논에 물을 대는 장치를 만들었다. 이 장치로 가뭄을 이겨낸 현감은 이 관노에게 큰 상을 내렸다. 이 관노가 바로 장영실(蔣英實)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번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장영실은 미천한 신분을 딛고 일어선 최고의 발명가였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장영실을 궁궐로 처음 부른 사람은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다. 태종은 각 지방을 다스리는 관찰사가 추천한 지방의 우수한 인재들을 한양으로 불러들여 일하게 하는 ‘도천법(道薦法)’을 시행했다. 태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추천하게 했다. 동래현의 관노였던 장영실이 한양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이 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1423년 평소 손재주가 좋은 장영실을 눈여겨 보고 있던 공조 참판 이천은 세종에게 장영실의 기술과 재주를 추천하였고, 세종은 장영실의 실력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세종은 관노에게 벼슬을 줄 수 없다는 신하들을 달래 장영실에게 벼슬을 주었다. 장영실은 세종의 뜻에 감사하며 과학 연구와 발명에 온 힘을 쏟았다. 뛰어난 재주와 능력을 인정받아 노비의 신분을 벗고 종3품의 벼슬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정작 그의 생몰(生沒:탄생과 죽음)은 물론, 성장 과정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장영실의 출신 성분 때문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장영실의 조상은 원나라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에 귀화하여 아산군(牙山君)에 봉해졌던 장서(蔣壻)의 9대손이며, 그의 집안은 고려 때부터 대대로 과학기술분야의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부친은 고려 말 전서라는 직책을 지낸 장성휘이며, 모친은 관기(官妓)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는 노비가 아니었지만 장영실이 관노인 이유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조선시대의 신분제도 때문이다. 조선시대 관기(官妓)들은 신분상 천민에 해당하여 딸을 낳으면 어머니를 따라 관기(官妓)가 되었고, 아들을 낳으면 관노(官奴)가 되었다.

태조에서 세종대까지 조선은 귀화인들의 정착을 위해 조선 여자와의 혼인을 주선하였는데, 귀화인들과 혼인한 여성들은 대체로 관노 출신들이 많았다. 그러나 한족(漢族)같은 출신 배경이 좋은 귀화인들은 대체로 양인 여성과 혼인하였으므로, 장영실의 모친은 정실부인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크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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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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