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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7일 수요일

고려 최초의 혼혈왕, 충선왕 2편

■ 고려 최초의 혼혈왕, 충선왕 2편

■ 고려 최초의 혼혈왕, 충선왕 2편

충렬왕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에 흥미를 잃었고 자신의 입지도 약화되었으므로, 충렬왕24년(1298년) 세자 왕원에서 선위(禪位)하였다. 세자 왕원은 24세의 젊은 나이로 고려 제 26대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충선왕(忠宣王)이다.

고려의 ‘충(忠)’자 돌림 왕들은 역사적으로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평가를 받는 왕이 충선왕이다. 다른 왕들과 달리 고려의 위기를 자각한 충선왕은 정국 쇄신을 도모하기 위해 정치와 사회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관제를 혁신하고, 권신들이 소유한 광대한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군제(軍制)·세제(稅制)를 정비하고 원나라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취임일 새벽을 기하여 참형과 교형 이외의 죄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충렬왕대에 권력을 잡았던 천민 출신 관료들을 배제하고, 승려의 직분을 새롭게 하고 초야에 묻혀 있는 소외된 선비들을 등용하여 문신의 힘을 키우고자 했다. 그리고 세도가에 빌붙거나 원나라에 아부하여 벼슬을 얻은 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들은 신분질서를 어지럽게 하고 또 그 세력을 이용해 많은 부를 누리고 있었다. 바로 이들을 정치·경제·사회의 폐단을 일으키는 장본인으로 지적하고 제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뇌물거래와 부정부패를 근절하고 세력가들이 농지를 탈취하고 노비를 빼앗는 것을 금지했다. 젊은 왕은 구폐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행하는 혁명을 하려했지만, 반원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어서 원나라와 기득권 세력들의 큰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리고 부인인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원나라와의 사이도 원만치 못하였다. 이 무렵 조비(趙妃)를 질투해 오던 왕비 계국공주와 왕의 반대파들에 의하여 음모사건(조비무고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개혁의 대상이었던 귀족에게 반격의 기회가 되었고, 반원적 요소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충선왕은 즉위년 8월, 원나라로부터 강제 퇴위당하고 원나라에서 온 사신에게 국새(國璽)를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졌다. 충선왕은 원나라에 소환되고 선위 7개월 만에 왕위는 다시 충렬왕에게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충선왕은 10년 동안 원나라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왕실의 치정문제가 아니었고, 충렬·충선 양 왕을 둘러싼 신하들의 정치적 중상모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원나라에 장기간 머무르는 동안 본국에서는 즉위 전부터 있던 부자간의 불화가 표면화되고 있었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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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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