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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7일 수요일

고려 최초의 혼혈왕, 충선왕 3편

■ 고려 최초의 혼혈왕, 충선왕 3편

■ 고려 최초의 혼혈왕, 충선왕 3편

1305년(충렬왕31년) 원나라의 성종(成宗)이 죽자 원나라에서는 황위쟁탈전이 일어났다. 충선왕은 승자가 된 무종(武宗)을 도왔으므로 그 세력에 힘입어 자신을 모함한 세력을 제거할 수 있었다. 1308년 고려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올랐다. 복위한 왕은 기강의 확립, 조세의 공평, 인재등용의 개방, 공신 자제의 중용, 농장업의 장려, 동성결혼의 금지, 귀족의 횡포 엄단 등 즉위교서 못지않은 혁신적인 복위교서를 발표하여 다시 한 번 혁신정치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원나라 생활에 젖어있던 그는 곧 정치에 싫증을 느꼈다. 제안대군 숙(淑)에게 정치를 대행시키고 원나라로 건너가 한 번도 귀국하지 않고, 전지(傳旨:임금의 명을 전달)로써 국정을 처리하였다. 더 이상 혁신정치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각염법(榷鹽法)을 제정하여 그때까지 사원(寺院)과 권문세가(權門勢家)에서 소금을 독점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고 소금의 전매를 단행하여, 한 해에 포(布) 4만 필의 국고수익을 늘리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러번 시도했던 관제개혁은 결국 원나라의 간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원나라에 머무는 충선왕 때문에 본국에서 해마다 포10만 필, 쌀4,000곡(斛) 이외에도 많은 물자를 운반함으로써 극심한 폐해가 있었다. 고려의 신하들이 귀국을 빈번히 간청하고 원나라에서도 귀국을 명하였으나,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1313년 둘째 아들 강릉대군 왕도(王燾)에게 전위(傳位)하였다. 같은 해 6월 잠시 귀국하여 아들 충숙왕을 즉위시키고 이듬해 다시 원나라로 가서 연경(燕京:북경)에 계속 머물며 끝내 귀국을 피하였다. 이는 본국에 대한 애착이 없고 원 왕실에서 우대해 주는 등의 이유도 있겠으나, 본성이 담박하고, 불(佛)을 좋아하고 글과 그림을 즐기는 등 정치와 권력에는 애착이 적었던 것이다.

그 뒤 연경(燕京)에 있는 자신의 저택 안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많은 서적을 수집하고, 조맹부(趙孟頫) 등 원나라 학자를 불러 고전을 연구하게 하였다. 또한, 고려에서 이제현(李齊賢)등의 학자를 불러 원의 학자들과 교유(交遊)하게 함으로써 문화교류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서도의 대가 조맹부의 글씨와 서법은 이제현으로 인해 고려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1320년(충숙왕7년) 원나라의 인종(仁宗)이 죽자 고려 출신 환관 임빠이엔토쿠스任伯顔禿古思의 모략으로 유배되었다가 1323년 태정제(泰定帝)의 즉위로 3년 만에 풀려났고, 원나라에 다시 돌아간 지 2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능은 덕릉(德陵)이고 개성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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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최초의 혼혈왕, 충선왕 2편

■ 고려 최초의 혼혈왕, 충선왕 2편

■ 고려 최초의 혼혈왕, 충선왕 2편

충렬왕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에 흥미를 잃었고 자신의 입지도 약화되었으므로, 충렬왕24년(1298년) 세자 왕원에서 선위(禪位)하였다. 세자 왕원은 24세의 젊은 나이로 고려 제 26대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충선왕(忠宣王)이다.

고려의 ‘충(忠)’자 돌림 왕들은 역사적으로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평가를 받는 왕이 충선왕이다. 다른 왕들과 달리 고려의 위기를 자각한 충선왕은 정국 쇄신을 도모하기 위해 정치와 사회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관제를 혁신하고, 권신들이 소유한 광대한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군제(軍制)·세제(稅制)를 정비하고 원나라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취임일 새벽을 기하여 참형과 교형 이외의 죄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충렬왕대에 권력을 잡았던 천민 출신 관료들을 배제하고, 승려의 직분을 새롭게 하고 초야에 묻혀 있는 소외된 선비들을 등용하여 문신의 힘을 키우고자 했다. 그리고 세도가에 빌붙거나 원나라에 아부하여 벼슬을 얻은 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들은 신분질서를 어지럽게 하고 또 그 세력을 이용해 많은 부를 누리고 있었다. 바로 이들을 정치·경제·사회의 폐단을 일으키는 장본인으로 지적하고 제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뇌물거래와 부정부패를 근절하고 세력가들이 농지를 탈취하고 노비를 빼앗는 것을 금지했다. 젊은 왕은 구폐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행하는 혁명을 하려했지만, 반원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어서 원나라와 기득권 세력들의 큰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리고 부인인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원나라와의 사이도 원만치 못하였다. 이 무렵 조비(趙妃)를 질투해 오던 왕비 계국공주와 왕의 반대파들에 의하여 음모사건(조비무고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개혁의 대상이었던 귀족에게 반격의 기회가 되었고, 반원적 요소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충선왕은 즉위년 8월, 원나라로부터 강제 퇴위당하고 원나라에서 온 사신에게 국새(國璽)를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졌다. 충선왕은 원나라에 소환되고 선위 7개월 만에 왕위는 다시 충렬왕에게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충선왕은 10년 동안 원나라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왕실의 치정문제가 아니었고, 충렬·충선 양 왕을 둘러싼 신하들의 정치적 중상모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원나라에 장기간 머무르는 동안 본국에서는 즉위 전부터 있던 부자간의 불화가 표면화되고 있었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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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최초의 혼혈왕, 충선왕 1편

■ 고려 최초의 혼혈왕, 충선왕 1편

■ 고려 최초의 혼혈왕, 충선왕 1편

충선왕은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外孫)으로 충렬왕의 셋째 아들이다. 어릴 때 이름은 왕원이고 몽고 이름은 익지례보화(益智禮普化, 젊은 황소라는 뜻)이다. 원래 셋째 아들은 왕위와는 거리가 멀지만, 충선왕의 어머니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쿠빌라이의 막내딸이었기에 세자가 될 수 있었다. 제국대장공주는 혈통 상 ‘황금씨족’이라고 불린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에 파워가 있었다.

왕원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고려사》에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총명하고 마음씀이 남달랐던 세자는 백성들의 삶이 곤궁함에도 날마다 사냥을 즐기는 부왕(父王)을 울며 말리기도 하였고, 땔나무를 지고 궁으로 들어온 자의 의복이 남루함을 보고 마음 아파하기도 하였다. 왕권을 대행할 때에는 세력가들에게 땅을 빼앗겨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들의 토지를 되돌려주기도 하였다. 원의 세조 쿠빌라이도 외손자의 영특함을에 기뻐하며 늘 마음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1277년(충렬왕3년) 3살 때 세자로 책봉되고, 다음 해 원나라에 가서 몽고식 이름을 받았다. 18살 때 왕원은 왕영·홍문계(洪文系)·조인규(趙仁規) 등의 딸을 비(妃)로 맞아들였다. 특히 왕영의 딸 정비(正妃) 왕씨는 1287년(충렬왕13년)에 공녀로 선발되었는데, 사정을 들은 세자의 요청으로 공녀 차출을 면하게 되었고 자신의 비(妃)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4년 후인 22살 때(충렬왕22년)에 연경(북경)의 황궁에서 원나라 쿠빌라이의 증손녀이자, 진왕(晉王) 감마라(甘麻剌)의 딸인 계국대장공주(國大長公主, 몽골명 寶塔實憐보탑실련)와 혼인했다.

1297년(충렬왕23년) 제국대장공주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39세였다. 부고를 받은 세자 왕원은 그해 6월 원나라로부터 돌아와 모후의 영전에 분향했다. 제국대장공주가 죽자 충렬왕은 원나라에서 입지가 약해졌고, 대신 새로 원나라 공주를 부인으로 맞아들인 세자 왕원이 고려의 새로운 권력자로 부상했다.

세자 왕원의 편에 붙은 대신들은 하나같이 충렬왕이 총애하던 궁인 무비(無比:백야단)를 모함했다. 세자 왕원은 궁인 무비와 그 측근을 체포하여 ‘무당을 시켜 제국대장공주를 저주하여 죽게 한 사실’을 자백하게 한 후 처형했다. 또한 충렬왕의 심복인 내시 도성기, 최세연, 전숙, 방종저, 중랑장 김근을 죽인 뒤에 부왕의 측근 40여 명을 숙청하고 조정을 장악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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