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최초의 혼혈왕, 충선왕 3편
■ 고려 최초의 혼혈왕, 충선왕 3편
1305년(충렬왕31년) 원나라의 성종(成宗)이 죽자 원나라에서는 황위쟁탈전이 일어났다. 충선왕은 승자가 된 무종(武宗)을 도왔으므로 그 세력에 힘입어 자신을 모함한 세력을 제거할 수 있었다. 1308년 고려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올랐다. 복위한 왕은 기강의 확립, 조세의 공평, 인재등용의 개방, 공신 자제의 중용, 농장업의 장려, 동성결혼의 금지, 귀족의 횡포 엄단 등 즉위교서 못지않은 혁신적인 복위교서를 발표하여 다시 한 번 혁신정치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원나라 생활에 젖어있던 그는 곧 정치에 싫증을 느꼈다. 제안대군 숙(淑)에게 정치를 대행시키고 원나라로 건너가 한 번도 귀국하지 않고, 전지(傳旨:임금의 명을 전달)로써 국정을 처리하였다. 더 이상 혁신정치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각염법(榷鹽法)을 제정하여 그때까지 사원(寺院)과 권문세가(權門勢家)에서 소금을 독점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고 소금의 전매를 단행하여, 한 해에 포(布) 4만 필의 국고수익을 늘리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러번 시도했던 관제개혁은 결국 원나라의 간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원나라에 머무는 충선왕 때문에 본국에서 해마다 포10만 필, 쌀4,000곡(斛) 이외에도 많은 물자를 운반함으로써 극심한 폐해가 있었다. 고려의 신하들이 귀국을 빈번히 간청하고 원나라에서도 귀국을 명하였으나,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1313년 둘째 아들 강릉대군 왕도(王燾)에게 전위(傳位)하였다. 같은 해 6월 잠시 귀국하여 아들 충숙왕을 즉위시키고 이듬해 다시 원나라로 가서 연경(燕京:북경)에 계속 머물며 끝내 귀국을 피하였다. 이는 본국에 대한 애착이 없고 원 왕실에서 우대해 주는 등의 이유도 있겠으나, 본성이 담박하고, 불(佛)을 좋아하고 글과 그림을 즐기는 등 정치와 권력에는 애착이 적었던 것이다.
그 뒤 연경(燕京)에 있는 자신의 저택 안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많은 서적을 수집하고, 조맹부(趙孟頫) 등 원나라 학자를 불러 고전을 연구하게 하였다. 또한, 고려에서 이제현(李齊賢)등의 학자를 불러 원의 학자들과 교유(交遊)하게 함으로써 문화교류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서도의 대가 조맹부의 글씨와 서법은 이제현으로 인해 고려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1320년(충숙왕7년) 원나라의 인종(仁宗)이 죽자 고려 출신 환관 임빠이엔토쿠스任伯顔禿古思의 모략으로 유배되었다가 1323년 태정제(泰定帝)의 즉위로 3년 만에 풀려났고, 원나라에 다시 돌아간 지 2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능은 덕릉(德陵)이고 개성에 남아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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