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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6일 화요일

혁명의 첫걸음, 토지개혁 2편

■ 혁명의 첫걸음, 토지개혁 2편

■ 혁명의 첫걸음, 토지개혁 2편

이색을 비롯한 온건파 신진사대부가 있는 한 정도전과 조준이 꿈꾸어온 토지개혁이 불가능했으므로 정도전은 결단을 내렸다. 정몽주를 제외한 권근, 이숭인, 하륜 등 온건파 신진사대부에게 있는 죄, 없는 죄를 다 뒤집어 씌워서 그들을 탄핵했다. 심지어 자신의 스승인 이색까지도 탄핵하고 고문을 시키고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정도전은 정몽주만큼은 믿었기 때문에 살려두었는데, 결국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고 만다.

온건파 신진사대부에게는 정몽주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주 치사한 방법으로 정치 정적들에게 보복을 한 정도전에게 정몽주는 아주 크게 실망했고, 40년 지기 친구이자 절친 선, 후배 관계였던 두 사람은 완전히 적이 되었다. 정몽주는 정도전에 비하면 온건한 개혁파이던 조준을 설득했다. 정몽주의 설득에 넘어간 조준은 결국 정몽주의 주장대로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는데 동의한다.

과전법은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을 막론하고 매 1결(結)당 10분의 1조(租)인 30두(斗)의 조를 받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보통 50%에 달했던 수조율을 대폭 경감하고 농민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고자 한 것이다. 이 과전법은 조준이 처음 주장한 ‘계민수전법’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미온적인 정책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백성들은 이 정도의 토지개혁도 감지덕지하여 환영하였다.

정도전은 과전법이라는 토지개혁이 양에 차지는 않았지만, 그 덕에 백성들의 지지 속에 조선 창업이라는 과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고작 조선개국 4년 만에 과전법의 도덕성은 흔들리고, 토지개혁 주창자인 조준과 혁명세력들이 오히려 부패에 앞장서고 있었다.

정도전은 창업의 기반이었던 혁명세력들과도 다투게 되었고, 창업의 또 다른 기반인 왕가의 왕자들과도 타협하지 않고 대립하였다. 그러면서도 정도전은 오히려 개혁의 속도를 더 높이려고 들었으므로, 그의 비극은 이미 시작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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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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