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1편
■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1편
헐버트는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좋아했던 인물로 힘없는 대한제국 말기에 일본의 강압과 침략행위를 전 세계를 통해 호소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외쳤던 인물이다. 한국을 사랑했던 헐버트는 현재 한강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으며 목사의 아들이었다. 가정이 모두 선교를 하던 기독교 가문인데, 가훈은 "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였다고 한다. 뉴욕 유니언신학교 출신으로 목회자의 길을 가던 그는 1886년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고 들어와 국립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했고, 나중에는 관립중학교(현재의 경기고등학교)에서 교편을 들다가 마침내 고종의 최측근이 되었다.
그는 대한제국이 높은 문화유산을 가진 나라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1891년 육영공원이 재정난으로 폐쇄되자 본국으로 들어갔다가 미감리회 선교사 신분으로 1893년에 다시 나와 주로 출판 일을 맡았는데, 특히 The Korean Repository, The Korea Review 같은 영문 잡지를 발행하여 한국의 역사, 종교, 문화를 외국에 알렸다. 그는 고종 황제가 믿는 몇 안 되는 외국인 중 하나였다.
일본에 의해 조선이 약탈되고 1895년 일본의 낭인들이 궁 한복판으로 쳐들어와 조선의 황후를 무참히 살해한 뒤 시체에 석유를 뿌려 궁의 뜰에서 불살라 버리는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그런 일제의 만행에 속수무책이었다. 심지어 맘 편히 먹고 마시고 잠들지도 못했다. 일본인들이 음식에 독을 탈까 침실로 쳐들어올까 불안해했던 것이다. 이 때 서울에 있던 몇몇 서양인들이 직접 조리한 음식을 매일 고종에게 제공하고 불침번을 서기도 했는데, 이 때 불침번을 자처한 이가 바로 헐버트다. 극도로 불안해하는 고종을 궁 밖 미국 공사관이나 선교사 사택으로 옮기려 했다가 미국 측의 항의로 미수에 그치고 말았는데(춘생문사건), 이 일에 헐버트가 깊숙이 간여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주변의 예상과 달리 일본이 승리한 뒤 노골적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위협하자, 고종은 1882년 미국과 체결했던 조미수호통상조약 중 첫 번 째 조항인, 조선과 미국에게 제3국이 피해를 입힐 경우 서로 도움을 준다는 선위조처의 약속을 기억하고 미국 정부 인사에게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할 특사로 헐버트를 떠올렸다. 1905년 10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으로 떠나는 헐버트에게 미국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친서를 맡겼다.
헐버트는 1905년 미국에 갔지만, 이미 미국정부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해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대한제국)을 각각 차지하기로 합의를 끝낸 상황이어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헐버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다 대한제국의 모든 외교권을 일본이 감리, 지휘하고 서울에 일본통감이 주재한다는 보호조약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헐버트는 한 장의 전보를 받는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을사조약은 무력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자신은 결코 서명하지 않았다는 고종의 목소리였다. 이후부터 헐버트는 저서와 여러 매체를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과 미국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