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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 일요일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4편

■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4편

■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4편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나라가 비통에 빠졌을 때 헐버트는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집필한다. 이 책에서 헐버트는 을사늑약의 울분으로 자결한 민영환을 애도하며 그의 애국충정의 정신이 한국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라 말했다.

민영환이 사망당시 입었던 피 묻은 옷을 마루 밑에 넣어두었는데, 거기 밑에서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또 그 책에 들어있는 사진 중엔 일본이 조선 땅을 몰수했을 때, 강력히 반발하던 한국인들을 처형한 장면을 찍은 사진이 있다.

그러한 약탈을 그냥 보고 넘길 수가 없었던 헐버트는 외국인 소유의 땅은 일제가 빼앗지 못할 것을 알고 땅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한국인들이 찾아왔을 때, 1푼에 그 땅을 구입한 것으로 꾸며 명의를 이전해 준 뒤 약탈이 끝나면 같은 값으로 다시 팔겠다는 확약서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헐버트는 은퇴 후 고향 매사추세츠에 머물며 미주 지역 한인 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정부가 들어선 후인 1949년 8월, 이승만의 초청을 받고 42년 만에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그때 나이 87세, 태평양을 건너는 긴 여행을 하기에는 무리였지만, 독립된 한국을 보고 싶은 일념에서 여행을 감행하였다.

마침내 한국에 도착하기는 했으나 여독(旅毒)으로 병을 얻어 서울 위생병원에 입원했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8월 5일 별세하였다. 그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그의 소원대로 그의 유해는 마포 강변 양화진 외국인 묘지 언덕에 안장되었다. 비록 외국인이었지만 나라를 팔아먹고 자기 가문과 개인의 안위만 챙기려는 대한제국 대신들에 비하면 우리 민족에게는 너무나 훌륭하고 고마운 사람이며, 진정한 한국 사랑을 보여주었다.

한국에서의 한자 이름은 허흘법(許訖法)이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 훈장 태극장을 받았다. 그는 한국에 나온 미국인 선교사 중에 자신을 선교사로 파송한 본국(미국) 정부나 선교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세력보다 피선교지, 피지배민족 입장에서 고난을 함께 하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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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로서는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몇 안 되는 친한파 선교사 중의 하나였다. 헐버트는 위기에 처한 한국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모든 것을 걸고 한국을 위해 싸웠다. 호머 헐버트는 헤이그 특사 사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교육과 사회 공헌, 종교 활동, 독립운동에서도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역사 속에서 새롭게 제대로 평가받아야 하며, 다시는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잊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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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3편

■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3편

■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3편

헐버트는 어려운 한글과 한국말을 조선에 온지 3년 만에 읽기와 쓰기에 심지어 한국어 교과서 《사민필지》를 집필할 정도로 익혔다고 한다. 《사민필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로 된 서양식 교과서이다. 선비와 백성, 모두가 함께 알아야 한다는 뜻의 제목은 신분과 상관없이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헐버트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책의 내용은 세계지리라고 보면 되는데 특이한 사항은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해서 다른 나라를 비교하는 묘사들이 들어있고, 전 세계를 아프리카대륙, 아메리카대륙 등으로 나누어서 지도도 함께 넣고 있다고 한다. 관립중학교에서 교사로 있던 시절, 헐버트는 영어과목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역사, 정치, 지리, 화학 까지도 가르치며, 인재양성만이 나라를 구하고 지킬 수 있는 길이라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교육만이 조선이 살아날 길이라고 생각하고, 1903년 YMCA 창립에 참여하여 이 단체를 사회 계몽단체로 가도록 방향을 잡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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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서재필, 주시경과 함께 만들었다. 당시에는 한글 표기에 띄어쓰기가 없었는데, 한글의 띄어쓰기 도입을 주장하였다. 같은 잡지에 한국인들은 흥이 있는 민족으로 음악을 매우 사랑한다며 아리랑을 서양식 음계로 채보한 최초의 악보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History of KOREA》 라는 우리나라 역사책과 《엄지마법사》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전래동화를 영어로 쓰는 등 한글 세계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금속활자, 거북선, 한글 등의 우리 발명품을 세계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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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세계는 제국주의가 널리 퍼졌기 때문에 미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을 당연하듯 생각하던 때였다. 호머 헐버트가 이런 노력을 한 것은 절대로 우리 민족이 나라를 빼앗길 민족이 아니며, 일본의 침략은 불법적인 것이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한국을 현존하는 문자 중 가장 뛰어난 문자라고 주장하고, 1903년 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한글이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주시경과 함께 한글 표기를 정리하며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를 도입한 사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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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시대에 찾아와 대한제국의 짧은 역사를 지켜온 헐버트는 회고록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을 통해 자신이 한국을 알게 됐고 사랑하게 됐고, 그래서 한국인과 함께 싸우게 됐노라고 밝혔다. 헐버트의 저술활동은 국제사회여론을 움직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나카라는 일본 대신이 ‘경천사 10층 석탑’을 무단으로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고발한 것이었다. 개성까지 찾아가 탑이 도난당한 현장을 확인한 헐버트는 재팬 크로니컬지에 이를 기고했다. 이어 뉴욕타임스에 고발하고 만국평화회의가 진행 중이던 헤이그에서도 유럽의 신문에 폭로했다. 비난 여론이 들끓자 일본정부는 어쩔 수없이 석탑을 돌려주었고, 경천사10층석탑은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2편

■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2편

■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2편

을사늑약 이후에도 고종은 포기하지 않고 을사늑약이 효력이 없음을 알리며 미국의 도움을 받아내기를 바랬다. 하지만 미국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종은 미국 반응이 신통치 않자 헐버트에게 9개국 국가원수에게 친서를 올리라고 위임장을 전달했다.

헐버트는 1년 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러시아 황제의 제안으로 만국평화회담이 열릴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이 소식을 상동 교회의 청년학원 교사들에게 알렸다. 헤이그 평화회담에 한국 대표를 파송하여 세계열강에 일본의 불법적 만행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자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 무렵 일본에 패하고 전세 만회를 노리던 러시아쪽에서도 극비리에 같은 정보를 고종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고종도 뒤늦게 외교권의 중요성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나왔다. 헤이그특사사건의 시작이다.

1907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3명(이준, 이상열, 이위종) 외에 또 다른 고종황제의 친서를 갖고 제4의 특사로 헐버트가 파견되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일행이 헤이그에 도착한 것이 1907년 6월 말. 두 달 전에 미리 와 있던 헐버트가 그들을 맞았다. 헐버트는 특사들의 회의 참석을 성사시키기 위해 외교관들을 접촉하면서 이들이 작성한 호소문을 불어로 번역하여 현지 신문에 실리도록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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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 정부의 집요한 방해 공작과 암묵적으로 일본을 지지하는 미국과 영국의 소극적 자세로 끝내 고종의 밀사들은 정식 회의석상에서 발언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울분을 참지 못한 이준이 돌연 사망하여 헤이그 시내 공동묘지에 묻혔고 나머지 밀사들은 허탈감에 빠져 헤이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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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는 좌절감에 빠진 밀사들과 함께 프랑스, 독일, 러시아를 거쳐 미국 등지를 돌며 일본의 불법 침략을 규탄하는 강연회를 열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픔을 위로하는 것이 선교사로서 자신이 할 일이라 여겼던 것이다. 이 같은 행적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이상설, 이위종 등 살아남은 밀사들은 궐석 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고 결국 시베리아-만주를 떠돌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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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지원했던 헐버트도 마찬가지였다. 1905년 5월 고종의 밀사로 워싱턴을 방문할 때부터 선교사 명부에서 그의 이름은 삭제되어 사라졌고, 미국 정부는 소환 형식으로 그의 한국 귀환을 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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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가 고종으로부터 받은 또 하나의 밀명은 황제가 독립자금으로 쓰기 위해 독일 영사의 보증과 황제의 친필 서명 없이는 절대로 인출될 수 없다는 약속을 받은 후에 독일 은행에 넣어놓은 돈(오늘날의 화폐가치로 약 천만달러(백억원)가 넘는(정확히는 202,316,42 마르크)을 찾아 한국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황제의 위임장과 지급 명령서를 가지고 상해의 독일 은행에 갔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이미 독일은행이 일본에게 그 돈을 내어준 뒤라 그냥 돌아와야 했다. 후에 헐버트 박사는 불법 인출이니 원래의 돈을 찾아 한국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애썼으나 돈을 찾지 못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1편

■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1편

■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1편

헐버트는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좋아했던 인물로 힘없는 대한제국 말기에 일본의 강압과 침략행위를 전 세계를 통해 호소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외쳤던 인물이다. 한국을 사랑했던 헐버트는 현재 한강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으며 목사의 아들이었다. 가정이 모두 선교를 하던 기독교 가문인데, 가훈은 "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였다고 한다. 뉴욕 유니언신학교 출신으로 목회자의 길을 가던 그는 1886년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고 들어와 국립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했고, 나중에는 관립중학교(현재의 경기고등학교)에서 교편을 들다가 마침내 고종의 최측근이 되었다.

그는 대한제국이 높은 문화유산을 가진 나라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1891년 육영공원이 재정난으로 폐쇄되자 본국으로 들어갔다가 미감리회 선교사 신분으로 1893년에 다시 나와 주로 출판 일을 맡았는데, 특히 The Korean Repository, The Korea Review 같은 영문 잡지를 발행하여 한국의 역사, 종교, 문화를 외국에 알렸다. 그는 고종 황제가 믿는 몇 안 되는 외국인 중 하나였다.

일본에 의해 조선이 약탈되고 1895년 일본의 낭인들이 궁 한복판으로 쳐들어와 조선의 황후를 무참히 살해한 뒤 시체에 석유를 뿌려 궁의 뜰에서 불살라 버리는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그런 일제의 만행에 속수무책이었다. 심지어 맘 편히 먹고 마시고 잠들지도 못했다. 일본인들이 음식에 독을 탈까 침실로 쳐들어올까 불안해했던 것이다. 이 때 서울에 있던 몇몇 서양인들이 직접 조리한 음식을 매일 고종에게 제공하고 불침번을 서기도 했는데, 이 때 불침번을 자처한 이가 바로 헐버트다. 극도로 불안해하는 고종을 궁 밖 미국 공사관이나 선교사 사택으로 옮기려 했다가 미국 측의 항의로 미수에 그치고 말았는데(춘생문사건), 이 일에 헐버트가 깊숙이 간여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주변의 예상과 달리 일본이 승리한 뒤 노골적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위협하자, 고종은 1882년 미국과 체결했던 조미수호통상조약 중 첫 번 째 조항인, 조선과 미국에게 제3국이 피해를 입힐 경우 서로 도움을 준다는 선위조처의 약속을 기억하고 미국 정부 인사에게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할 특사로 헐버트를 떠올렸다. 1905년 10월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으로 떠나는 헐버트에게 미국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친서를 맡겼다.

헐버트는 1905년 미국에 갔지만, 이미 미국정부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해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대한제국)을 각각 차지하기로 합의를 끝낸 상황이어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헐버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다 대한제국의 모든 외교권을 일본이 감리, 지휘하고 서울에 일본통감이 주재한다는 보호조약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헐버트는 한 장의 전보를 받는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을사조약은 무력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자신은 결코 서명하지 않았다는 고종의 목소리였다. 이후부터 헐버트는 저서와 여러 매체를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과 미국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