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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 일요일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2편

■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2편

■ 숨은 조력자, 호머 헐버트 2편

을사늑약 이후에도 고종은 포기하지 않고 을사늑약이 효력이 없음을 알리며 미국의 도움을 받아내기를 바랬다. 하지만 미국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종은 미국 반응이 신통치 않자 헐버트에게 9개국 국가원수에게 친서를 올리라고 위임장을 전달했다.

헐버트는 1년 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러시아 황제의 제안으로 만국평화회담이 열릴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이 소식을 상동 교회의 청년학원 교사들에게 알렸다. 헤이그 평화회담에 한국 대표를 파송하여 세계열강에 일본의 불법적 만행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자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 무렵 일본에 패하고 전세 만회를 노리던 러시아쪽에서도 극비리에 같은 정보를 고종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고종도 뒤늦게 외교권의 중요성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나왔다. 헤이그특사사건의 시작이다.

1907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3명(이준, 이상열, 이위종) 외에 또 다른 고종황제의 친서를 갖고 제4의 특사로 헐버트가 파견되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일행이 헤이그에 도착한 것이 1907년 6월 말. 두 달 전에 미리 와 있던 헐버트가 그들을 맞았다. 헐버트는 특사들의 회의 참석을 성사시키기 위해 외교관들을 접촉하면서 이들이 작성한 호소문을 불어로 번역하여 현지 신문에 실리도록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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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 정부의 집요한 방해 공작과 암묵적으로 일본을 지지하는 미국과 영국의 소극적 자세로 끝내 고종의 밀사들은 정식 회의석상에서 발언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울분을 참지 못한 이준이 돌연 사망하여 헤이그 시내 공동묘지에 묻혔고 나머지 밀사들은 허탈감에 빠져 헤이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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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는 좌절감에 빠진 밀사들과 함께 프랑스, 독일, 러시아를 거쳐 미국 등지를 돌며 일본의 불법 침략을 규탄하는 강연회를 열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픔을 위로하는 것이 선교사로서 자신이 할 일이라 여겼던 것이다. 이 같은 행적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이상설, 이위종 등 살아남은 밀사들은 궐석 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고 결국 시베리아-만주를 떠돌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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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지원했던 헐버트도 마찬가지였다. 1905년 5월 고종의 밀사로 워싱턴을 방문할 때부터 선교사 명부에서 그의 이름은 삭제되어 사라졌고, 미국 정부는 소환 형식으로 그의 한국 귀환을 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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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가 고종으로부터 받은 또 하나의 밀명은 황제가 독립자금으로 쓰기 위해 독일 영사의 보증과 황제의 친필 서명 없이는 절대로 인출될 수 없다는 약속을 받은 후에 독일 은행에 넣어놓은 돈(오늘날의 화폐가치로 약 천만달러(백억원)가 넘는(정확히는 202,316,42 마르크)을 찾아 한국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황제의 위임장과 지급 명령서를 가지고 상해의 독일 은행에 갔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이미 독일은행이 일본에게 그 돈을 내어준 뒤라 그냥 돌아와야 했다. 후에 헐버트 박사는 불법 인출이니 원래의 돈을 찾아 한국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애썼으나 돈을 찾지 못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