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9일 수요일

각자위정ㅣ各自爲政

각자위정ㅣ各自爲政

각자위정ㅣ各自爲政

○ 사람이 각자 자기 멋대로 행동하면 결과가 뻔하다

○ 各(각각 각) 自(스스로 자) 爲(할 위) 政(정사 정)

사람이 각자 자기 멋대로 행동하며 전체와의 조화나 협력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 결과가 뻔함

춘추 시대의 일이다. 송(宋)나라가 진(晉)나라와 서로 협력하였기 때문에 송나라와 초(楚)나라는 사이가 벌어졌다. 이에 초나라 장왕(莊王)은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동맹국인 정(鄭)나라에 명하여 송나라를 치게 했다.

결전 전야에 송나라의 대장 화원(華元)은 장졸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특별히 양고기를 지급했다. 장졸들은 모두 크게 기뻐했지만, 화원의 마차부 양짐(羊斟)만은 이 양고기를 먹지 못했다.

어떤 부장(副將)이 그 이유를 묻자 화원은 이렇게 대답했다."마차부 따위를 먹일 필요는 없다. 마차부는 전쟁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내가 한 일에 아무 참견 말게.“

이튿날 양군의 접전이 시작되었다. 화원은 양짐이 모는 마차 위에서 지휘를 했다. 송나라와 정 나라의 군사가 모두 잘 싸워 쉽게 승패가 나지 않아 화원이 양짐에게 명령했다. "마차를 적의 병력이 허술한 오른쪽으로 돌려라.” 그러나 양짐은 반대로 정나라 군사가 밀집해 있는 왼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당황한 화원이 소리쳤다."아니, 어디로 가려는 것이냐!" "어제의 양고기는 당신의 뜻이며, 오늘의 이 일은 나의 생각이오."

양짐이 이렇게 말하며 곧바로 정 나라 군사가 모여 있는 곳으로 마차를 몰았기 때문에 화원은 마침내 붙잡히고 말았다. 대장이 포로가 된 것을 본 송나라는 전의를 상실했다.

그 결과 250여 명의 군사가 적군에게 사로잡히고 사공(司空)까지 포로가 되었다. 정 나라 군사는 도합 460량의 병거(兵車)를 포획 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송나라의 대패는 바로 양짐이 화원의 지휘에 따르지 않고 "各自爲政"했기 때문이다.

슬견외경ㅣ蝨犬畏敬

슬견외경ㅣ蝨犬畏敬

슬견외경ㅣ蝨犬畏敬

○ 이나 개의 목숨도 소중히 여기다.

○ 蝨(이 슬) 犬(개 견) 畏(두려워할 외) 敬(공경 경)

고려시대 문호 李奎報(이규보)의 ‘東國李相國集(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수필 ‘虱犬說(슬견설, 虱은 蝨과 같은 이 슬)’에 나온다. 고전번역원의 한역을 토대로 간단히 추려보면 이렇다. 한 사람이 찾아와 길거리서 개를 잡는 모습을 보았다며 그 모습이 참혹하여 앞으로는 개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白雲居士(백운거사, 이규보 아호)가 답하길 화로를 끼고 이를 잡는 어떤 사람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 자기는 다시 이를 잡지 않겠다고 했다. 그 사람이 미물과 큰 동물을 동일시하여 말하니 놀리는 것이라고 화를 냈다. 그래서 타이른다. ‘무릇 혈기가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 말 돼지 양 곤충 개미에 이르기까지 삶을 원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은 동일한 것이네’ 그러면서 물러나서 달팽이 뿔을 쇠뿔과 같이 보고 메추리를 큰 붕새처럼 같이 보게 되면 도를 논의하자고 말했다.

만물은 크기나 겉모습, 인간에 대한 이로움과 해로움과는 상관없이 모두 근원적으로 동일한 존재라고 인식한 사상은 菜根譚(채근담)의 ‘쥐를 위해 항상 밥을 남겨두고, 나방을 위해 등불을 켜지 않는다고 한 말과 통한다.

흉중생진ㅣ胸中生塵

흉중생진ㅣ胸中生塵

흉중생진ㅣ胸中生塵

○ 가슴에 먼지가 생긴다

○ 胸(가슴 흉) 中(가운데 중) 生(날 생) 塵(티끌 진)

가슴에 먼지가 생긴다는 뜻으로, 사람을 잊지 않고 생각은 오래 하면서 만나지 못함을 일컫는 말, 마음속에 고통∙비애 따위의 감정이 일어남을 이르는 말. ② 오랫동안 남을 그리워하면서 만나지 못하고 있음.

주희(朱熹)편에 이런 글귀가 있다.

十年不共賦陽春(십년불공부양춘)

正有胸中萬斛塵(정유흉중만곡진)

10년 동안 봄을 읊기 함께 하지 못하여,

가슴속에는 만 섬 티끌 바로 쌓였구나.

구이지학ㅣ口耳之學

구이지학ㅣ口耳之學

구이지학ㅣ口耳之學

○ 들은 것을 새기지 않고 남에게 전하기만 한다

○ 口(입 구) 耳(귀 이) 之(어조사 지) 學(배울 학)

들은 것을 새기지 않고 그대로 남에게 전하기만 한다. 조금도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한 학문

군자의 학문은 귀에 들어가면 그대로 마음에 말하고, 신체에 정착하여 인격을 높이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사소한 말이나 동작도 많은 사람이 거울이 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면 곧바로 입으로 나온다. 즉 들은 대로 즉시 타인에게 전하고, 조금도 자신을 수양하는 양식으로 두지 않는다. 귀와 입 사이는 겨우 네 치, 그 네 치 사이만 신체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口耳之學"이라고 한다. 이래서는 대장부의 마음과 행동을 훌륭하게 할 수가 없다.

"

性惡說(성악설)을 주창한 荀子(순자)는 자신의 몸을 갈고 닦아 덕을 쌓기 위해 배웠던 학문이 변질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배움을 오로지 남을 가르쳐 먹고 살기 위한 생활의 방편으로만 쓴다는 것이었다. 勸學篇(권학편)에서 말한 내용을 보자.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 입으로 나온다. 입과 귀 사이는 네 치밖에 안 되는데, 어찌 일곱 자의 몸을 아름답게 하기에 족하겠는가(小人之學也 入乎耳 出乎口 口耳之間 則四寸耳 曷足以美七尺之軀哉/ 소인지학야 입호이 출호구 구이지간 즉사촌이 갈족이미칠척지구재). 軀는 몸 구. 즉 순자는 들은 것이나 배운 것을 깊이 새겨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겨를도 없이 즉시 남에게 그대로 전달해 자신의 학문과 지식을 자랑하는 것을 꼬집었다.

",

"

비슷한 뜻으로 남긴 孔子(공자)의 길에서 들은 것을 길에서 그대로 옮기는 것은 덕을 버리는 짓이다(道聽塗說 德之棄也/ 도청도설 덕지기야)라는 말이나 孟子(맹자)의 사람의 병폐는 남의 스승 되기를 좋아하는데 있다(人之患 在好爲人師/ 인지환 재호위인사)고 남 앞에서 아는 체하기를 좋아하는 소인을 꼬집었다. 옛글을 외우고 다음 질문만 기다리는 記問之學(기문지학)이나 외워서 읊기만 하는 記誦之學(기송지학)도 옳은 학문의 태도가 아님은 물론이다.

"

송양지인ㅣ宋襄之仁

송양지인ㅣ宋襄之仁

송양지인ㅣ宋襄之仁

○ 송나라 양공의 인정

○ 宋(송나라 송) 襄(도울 양) 之(갈 지) 仁(어질 인)

송(宋)나라 양공(襄公)의 어짊」이라는 뜻으로,쓸데없이 베푸는 인정(人情)을 이르는 말

춘추 시대인 주(周)나라 양왕(襄王) 2년(B.C.650), 송(宋)나라 환공(桓公)이 세상을 떠났다. 환공이 병석에 있을 때 태자인 자부(玆父)는 인덕(仁德)이 있는 서형(庶兄) 목이(目夷)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하려 했으나 목이는 굳이 사양했다. 그래서 자부가 위(位)에 올라 양공이라 일컫고 목이를 재상에 임명했다.

"

그로부터 7년 후(B.C.643), 춘추의 첫 패자(覇者)인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죽고, 송나라에는 운석(隕石)이 떨어졌다. 이는 패자가 될 징조라며 양공은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여섯 공자간에 후계 다툼이 치열한 제나라로 쳐들어가 공자 소(昭:孝公)를 세워 추종 세력을 만들었다. 이어 4년 후에는 송, 제, 초(楚) 세 나라의 맹주(盟主)가 되었다. 목이는 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이라며 걱정했다.

",

이듬해 여름, 양공은 자기를 무시하고 초나라와 통교(通交)한 정(鄭)나라를 쳤다. 그러자 그 해 가을,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했다. 양공은 초나라 군사를 홍수(泓水:하남성 내)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으나 전군이 강을 다 건너왔는데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목이가 참다못해 진언했다."적은 많고 아군은 적사오니 적이 전열(戰列)을 가다듬기 전에 쳐야 하옵니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군자는 어떤 경우든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 법이오."양공은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열세(劣勢)한 송나라 군사는 참패했다. 그리고 양공 자신도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이 악화하는 바람에 결국 이듬해 죽고 말았다.

월녀제희ㅣ越女齊姬

월녀제희ㅣ越女齊姬

월녀제희ㅣ越女齊姬

○ 월나라와 제나라의 미인, 미인이 많이 나는 고장

○ 越(넘을 월) 女(여자 녀) 齊(가지런할 제) 姬(여자 희)

중국 4대 미인을 나타내는 沈魚落雁(침어낙안)과 閉月羞花(폐월수화) 말고도 시원스런 눈동자와 하얀 이 明眸皓齒(명모호치, 眸는 눈동자 모), 버들잎 눈썹과 복숭아꽃 얼굴 柳眉桃顔(유미도안) 등 부지기수다. 또 전 세계 미인대회를 휩쓰는 나라 베네수엘라와 같이 미인이 특별히 많은 나라가 예전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중국 春秋時代(춘추시대)부터 揚子江(양자강) 이남의 越(월)나라와 그 서쪽의 吳(오)나라, 그리고 黃河(황하) 남쪽의 齊(제)나라가 대표적인 미인의 나라였단다. 그래서 吳姬越女(오희월녀) 또는 越女齊姬(월녀제희)라는 성어가 남았다.

前漢(전한) 초기의 문인 枚乘(매승)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름 높아 산문과 운문의 중간 형식인 ‘七發(칠발)’이란 작품을 남겼다. 여기에서 누구나 다 갖고 싶어 하고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실은 해서는 안 될 일이라 하며 미인에 대해 조심할 것도 든다. 중간 부분에 ‘흰 이와 고운 눈썹의 여인은 목숨을 찍는 도끼이고, 달고 무르고 기름지고 맛이 진한 음식은 창자를 썩게 하는 약(皓齒蛾眉 命曰伐性之斧 甘脆肥膿 命曰腐腸之藥/ 호치아미 명왈벌성지부 감취비농 명왈부장지약)’이라며 이어진다. ‘월녀는 앞에서 시중들고 제희는 뒤에서 받들게 하여 쾌락에 빠지면(越女侍前 齊姬奉後往來游讌/ 월녀시전 제희봉후왕래유연)’ 독약을 마시고 맹수의 어금니와 희롱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노마십가ㅣ駑馬十駕

노마십가ㅣ駑馬十駕

노마십가ㅣ駑馬十駕

○ 둔한 말이 열흘 동안 수레를 끌다

○ 駑(둔한 말 노) 馬(말 마) 十(열 십) 駕(멍에 가)

둔한 말도 열흘 동안 수레를 끌 수 있다는 뜻으로,재주 없는 사람도 노력(努力)하고 태만(怠慢)하지 않으면 재주 있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비유

荀子(순자)는 중국 戰國時代(전국시대, 기원전 403년~221년) 말기 趙(조)나라 사람으로 性惡說(성악설)을 주창해 孟子(맹자)를 비판했다. 그의 사상을 모은 ‘순자’는 여러 번 정리를 거쳐 32편으로 되어 있다. 둔한 말의 사례는 몇 곳에 나오는데 먼저 가장 처음의 勸學(권학)편의 내용을 보자.

‘흙이 쌓여 산이 이루어지면 바람과 비가 일어나고, 물이 모여 연못을 이루게 되면 교룡이 생겨난다고 하면서 이어진다. ‘천리마라도 한 번에 열 걸음을 뛸 수는 없으며, 야위고 둔한 말이라도 열흘 동안 달릴 수 있는 것은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오는 修身(수신)편의 부분도 비슷하다. ‘무릇 천리마는 하루에 천 리를 거뜬히 달리지만, 비루먹은 말일지라도 열흘 동안 달려간다면 역시 이에 미칠 수 있다’ 배움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일관된 의지와 실천이라고 순자는 강조했다.

속수지례ㅣ束脩之禮

속수지례ㅣ束脩之禮

속수지례ㅣ束脩之禮

○ 묶은 육포의 예절이라는 말

○ 束(묶을 속) 脩(육포 수) 之(어조사 지) 禮(예 례)

스승을 처음 만나 가르침을 청할 때 작은 선물을 함으로써 예절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말하기를,‘속수(束脩)를 행한 자에서부터 그 이상은 내 일찍이 가르쳐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속(束)’은 다발로 열 개를 말하며,‘수(脩)’는 말린 고기 포를 뜻한다.

이 속수는 예물 가운데서 가장 약소한 것이다. 공자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러 갈 때는 반드시 선물을 갖고 갔는데, 그것은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공자는 돈을 벌기 위해 제자들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공자는 모든 가르침은 예(禮)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그가 제자들에게 속수 이상의 예물을 가지고 오도록 한 것은 제자의 예를 지키도록 한 것이다.

공자가 천명을 깨닫고 이 세상을 구제하려 하였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람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고 사회를 인간 사회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예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예를 만들어 내어 인간 사회를 건설했던 주공(周公)을 모범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예의 형식에서 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도(道)를 알아야 하고, 도를 확실히 알고 실천할 수 있기 위해서는 덕(德)을 밝혀야 하며, 덕을 밝히는 근본적인 방법은 인(仁)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귀이천목ㅣ貴耳賤目

귀이천목ㅣ貴耳賤目

귀이천목ㅣ貴耳賤目

○ 귀를 귀하게 여기고 눈을 천하게 여기다.

○ 貴(귀할 귀) 耳(귀 이) 賤(천할 천) 目(눈 목)

귀를 귀하게 여기고 눈을 천하게 여기다. 멀리서 들어온 것만 중시하다. ‘남의 손의 떡이 더 커 보이고 남이 잡은 일감이 더 헐어 보인다’는 속담대로다.

옛것은 귀하게 여기고 새 것은 하찮게 여긴다는 貴古賤今(귀고천금)과 같이 보면 복고주의적 성격이 강한 중국인들의 풍조를 꼬집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국 漢(한)나라 초기의 유학자 桓譚(환담, 기원전24~기원후56)의 ‘新論(신론)’에 잘 표현한 대목이 나온다. 세상 사람들은 먼 곳의 소문만 중하게 여기고, 가까운 데서 제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천한 것으로 여긴다면서 이어진다. ‘세상 사람들은 옛것을 귀하게 여기고 지금 것을 비천하게 여기며, 귀로 들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눈으로 본 것을 천한 것으로 여긴다(世咸尊古卑今 貴所聞 賤所見/ 세함존고비금 귀소문 천소견).’

後漢(후한)의 문인 겸 과학자인 張衡(장형, 78~139)은 ‘東京賦(동경부)’에서 더 신랄하게 꾸짖는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후학들이 속뜻은 모르고 겉만 이어받아 전하며, 들은 것만 귀히 여기고 눈으로 본 것은 천하게 여긴다(所謂末學膚受 貴耳而賤目者也/ 소위말학부수 귀이이천목자야).’ 末學(말학)은 천박한 학문, 膚受(부수) 역시 피부에 받아들인 피상적인 학문이란 뜻. 잘 알지 못하는 이론이나 귀로만 전해들은 지식을 더 신뢰하는 세태를 비판했다.

맥구읍인ㅣ麥丘邑人

맥구읍인ㅣ麥丘邑人

맥구읍인ㅣ麥丘邑人

○ 맥구읍의 사람, 노인을 뜻한다.

○ 麥(보리 백) 丘(언덕 구) 邑(고을 읍) 人(사람 임)

제환공은 맥구로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그 읍에서 사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환공은 그 노인과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당신은 어느 곳 사람이오?" "맥구읍 사람입니다." "나이는 몇이나 되었소?" "여든세 살입니다." "좋겠소. 장수를 하여...... 당신의 장수로써 과인을 위해 기도해 주시오." "주군을 축원합니다. 주군께서 대단한 장수를 하게 하소서. 돈과 옥은 천한 것이고, 사람이 귀한 것입니다."

"좋은 말이오. 지극히 덕스러운 자는 외롭지 않소. 다시 한 말씀 해주시오." "주군을 축원합니다. 주군으로 하여금 배우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고, 아래 사람들에게 묻는 것을 싫어하지 않게 하십시오. 현명한 자는 항상 곁에 간언하는 자를 있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