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으로 산다는 것 10편
■ 왕으로 산다는 것 10편
조선 초기만 해도 왕들의 여가생활은 몹시 활동적이었다. 태조 이성계나 태종은 틈만 나면 매사냥을 즐겼다. 그러나 왕이 매사냥을 자주 다니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 하여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매사냥 이외에 왕이 종친들과 즐긴 놀이로 격구(擊毬)가 있다. 온천욕도 빼놓을 수 없는 여가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왕들은 대체로 몸이 약하여 잔병을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부스럼으로 고생한 왕들이 적지 않았는데, 온천욕이 피로를 풀어주고 피부를 회복시키는 데 효험이 있었다. 그러나 왕이 대궐 밖으로 한 번 행차하는 데는 호위병과 수행관료 등을 포함하여 5000명 안팎의 대규모 인원이 동원되어야 한다,
온천행을 자주 즐기는데 너무 거창하고 비용이 많이 들었으므로 현종 때는 서울 부근의 온천수를 대궐로 운반하여 대궐 안에서 온천을 하는 방법도 등장했다.
왕은 보통 10살 전후에 혼례를 치르므로 부부간의 정을 느끼기에는 너무 어리다. 또 왕비는 대체로 정략적인 차원에서 선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애정을 갖기보다는 모범적인 국부와 국모로서 처신해야 한다는 부담이 앞서는 관계가 되기 쉽다. 따라서 왕이 성년이 된 후 연정을 느끼는 대상에는 후궁이 많았다.
왕은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또 아들로서 느끼는 기본적인 인간의 정들이 극도로 억제되고 통제되는 상황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는 국모로 떠받들어지는 왕비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의 왕은 일생을 거치면서 무수한 호칭을 받게 된다. 원칙적으로 왕은 태어날 때 이름을 갖지 않는다. 왕의 적장자로 태어나면 원자가 될 뿐이다. 그러다가 관례를 행하면 자(字)를 받고, 세자에 책봉될 때 이름을 받는다. 관례 때 받는 자(字)는 그 사람이 일생동안 명심해야 할 훈계 또는 축복의 내용을 담은 두 글자로 이루어진다. 예컨대 세종의 자는 원정(元正)이었고, 정조는 형운(亨運)이라 했다.
이름은 세자 책봉 때 받는다. 조선시대에는 이름을 휘(諱)라고 하였는데, 이름은 그 사람 자체를 나타내고 또 그 사람의 운명이 걸린 것으로 보아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이름 대신 관례 때 받은 자(字), 또는 스승이나 자신이 지은 호(號)를 부르는 것이 예이다. 이런 관습은 왕에게는 더 심하게 적용되었다.
역대 왕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도 없었으며, 만약 잘못하여 글로 쓰면 큰 벌을 받았으므로 상소문이나 과거시험, 또는 문장을 지을 때 그 글자들을 피해야 했다. 따라서 왕의 이름은 언어생활에서 사용되지 않는 특이한 글자를 쓰거나 아니면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창업이나 반정을 통해 왕이 되거나, 방계로부터 들어와서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 왕이 됨과 동시에 개명하였다.
왕들도 일반 유학자들처럼 자신의 호(號)를 갖는다. 호는 자신이 스스로를 표시하기 위해 붙이거나 스승 또는 친구들이 붙여주는 일종의 별명이다. 정조는 홍재(弘齋)이고, 순조는 순재(純齋)이다.
- 11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