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읽어주는 남자, 전기수傳奇叟 1편
■ 책 읽어주는 남자, 전기수(傳奇叟) 1편
조선 후기 한글소설은 필사(筆寫), 낭독(朗讀), 세책(貰冊:빌림)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유통되면서 수적으로 증가하고 점차 대중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때맞춰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소설책을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읽어 주고 일정한 보수를 받아 생활하는 직업적인 낭독가가 등장하였는데, 이들을 ‘전기수(傳奇叟)’라 한다. ‘듣는 소설’인 ‘오디오북’의 시대가 이미 조선시대 전기수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한글소설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와 역사이야기, 삼국지나 수호지 같은 중국 고전소설을 읽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전기수는 단순히 기계적으로 낭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 등장인물의 역할에 맞춰 억양과 몸짓, 인물의 행동과 표정 등을 생동감 있게 바꿔가며 청중들의 몰입도를 높였다. 우리의 국문(國文) 고소설(古小說)이 대개 4·4조의 운율을 형성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기수는 18세기에서 20세기 중반 사이에 주로 활동하였다. 17세기 이후 한글문학이 발전하고 책의 인쇄량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책값은 상당히 비싸서 빌려 읽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한, 원하는 책을 마음껏 빌려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문맹자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전기수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로 각 마을이나 시장판, 양반집을 돌아다니며 책을 읽어주었다.
전기수는 뒷골목 상권을 형성하는 주역들이었다. 그들은 종로 뒷골목이나 청계천 주변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당시 유행하던 소설을 읽어줬다. 조수삼이 지은 《전기수(傳奇叟)》라는 글을 보면 당시 운종가 혹은 청계천 아래 여러 상점 주인이 책 읽어주는 사람을 고용해 손님을 모으는 광경이 묘사돼 있다.
전기수들은 한양 서쪽에서 광화문까지 올라갔다가 다음 초이렛날(매달 초하룻날부터 헤아려 일곱째 되는 날)부터는 동대문 방향으로 내려온다. 그렇게 한양 도심을 오르내리면서 청중을 몰고 다녔다. 그들은 군중의 심리를 잘 파악해 책을 읽다가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부분에 이르면 갑자기 읽는 것을 멈추기도 했다. 그러면 청중들은 다음 대목이 궁금해 앞을 다투어 돈을 던졌다. 이때가 전기수에게 공식적인 수입이 생기는 순간이다.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전기수들이 돈을 버는 절묘한 기술이라 하여 요전법(邀錢法)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이처럼 전기수의 인기가 치솟았고, 인기 있는 여러 명의 전기수가 생겨났다. 이야기 중에는 재미는 물론이고 세상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의미도 있었기에 사람들이 좋아했다. 《삼국지》나 《수호지》 등 긴박감이 감도는 인기 소설을 읽을 때면 많은 독자가 몰렸고, 연암이 지은 《양반전》과 같은 풍자소설도 인기를 끌었다.
심청전을 들려주면 효심에 감복했고, 춘향전을 낭독하면 시련을 이겨낸 절절한 사랑 이야기에 환호했다. 그들만의 낭독 법도 있었다. 읊조리듯 노래하듯 낭독하고, 눈길과 표정은 청중에게 맞추면서 끊어 읽기를 하는 등 화려한 기술로 생생하고 긴장감 넘치게 이야기를 전한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