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읽어주는 남자, 전기수傳奇叟 2편
■ 책 읽어주는 남자, 전기수(傳奇叟) 2편
유명한 전기수들은 양반가나 부유한 사람들에게 찾아가 낭독을 하게 되었다. 특히, 규방 여성들은 소설을 매우 좋아하여 전기수들은 직접 화장까지 하며 이야기를 펼치고 많은 돈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글공부를 해야 될 양반들이나 유생들이 엉뚱한 데에 빠지게 한다는 이유도 있었고, 일부 전기수들은 인기를 이용해서 여자들만의 공간인 규방에 드나들며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인식은 그리 좋지 못했다. 내외분별을 어기고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경우 말썽을 일으킨 전기수들은 활동을 못하게 벌을 주고 유배를 보냈다. 그래도, 여전히 전기수들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1790년(정조 14년) 8월 10일 《정조실록》의 기사를 보면 당시 유명한 전기수가 익명의 군중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기록돼 있다. 오늘날로 치면 종로에서 을지로 사이 약재상과 담배 가게가 밀집한 골목 공터에서 전기수 한 명이 대중들 앞에서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담배 가게 앞 전기수 주위로는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었고, 모두들 전기수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살인 사건이 터진 것이다. 알고 보니 전기수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던 청중 한 명이 나쁜 주인공을 응징한다며 들고 있던 낫으로 전기수를 죽인 것이다.
책 읽는 솜씨가 얼마나 뛰어나면 현실과 책 속 이야기를 혼동해 그만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살인을 저질렀을까? 당시 죽은 사람은 전기수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업복이었다. 그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서얼 출신이라고 전해지는 것을 보아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은 양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천민이었을 것이다.
전기수는 구한말과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많은 직업들이 소멸한 것과는 다르게 1910~1930년대까지도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고, 60년대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때 영화와 레코드, 라디오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영화를 보려면 상당히 부담이 가서 아무 때나 볼 수 없었고, 라디오는 구입은 물론이고 비싼 청취료로 인해 큰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유층이 아니고서는 레코드를 구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다방 같은 데 가서 들어야 되니 돈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기수들은 시장판에 가기만 하면 볼 수 있었고 듣는 가격도 비교적 쌌으며, 문맹률이 70%-80%대를 넘나들 정도이니 전기수에 대한 인기가 여전했던 것이다.
이는 광복 이후로도 이어져서 라디오의 보급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대중화한 것은 아니었고, 텔레비전이 등장했다고는 하지만 이 역시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던 사치품이라서 부자들이나 가질 수 있던 물건이었으니 전기수들은 값싸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전문적인 전기수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책을 팔려고 나온 책장수들이 책의 내용을 읽어주며 손님을 끄는 경우도 있었다. 어차피 당시에는 책을 살 수 있는 소비자층이 한정되어있었기 때문이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