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1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1편
인조는 즉위 10개월 만에 커다란 위기를 맞이한다. 1624년 1월에 일어난 ‘이괄의 난’은 인조반정의 명분에 큰 오점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인조는 반정을 같이 한 평안병사 겸 부원수 이괄이 병사 수만 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다는 고변을 듣고도 처음에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인조는 도원수 장만과 부원수 이괄이 서북 방어를 위해서 현지로 떠날 때 모화관까지 가서 친히 전송을 했고, 어도(御刀)를 내려주며 수레바퀴를 밀어줄 정도로 애정과 신뢰를 보냈기 때문이다.
좌찬성 이귀는 이괄이 반역을 한다는 고변서(告變書)를 근거로 이괄을 잡아서 국문할 것을 청했다. 인조는 “이괄은 충성스러운 사람인데 어찌 반역을 하겠는가?”라고 이귀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날 사헌부 사간원에서도 이괄을 체포해서 국문할 것을 청했다. 인조는 “이괄은 충성스러운 신하”라고 다시 강조하면서 “이괄이 아니면 부원수의 직임을 맡을 수 없으니 두 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라고 여전히 이괄의 충성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괄은 무과로 합격했으나 글을 잘하고 글씨도 잘 써서 명성이 있었다. 인조가 이괄에게 이렇게 무한 신뢰를 보내고 있을 때, 이괄은 반란의 모든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괄은 왜 반란을 일으켰을까?
인조는 반정을 성공한 이틀 후 반정에 참여한 장수와 병졸들을 모화관으로 초청해서 위로의 잔치를 벌였다. 이 때 자리배치가 이괄의 심기를 건드렸다. 상석(上席)에 해당하는 맨 위쪽은 김류 그 다음은 이귀, 이괄의 순이었다. 이괄은 자신의 자리가 김류 아래에 있는 것에 분노해서 눈으로 흘겨보았다. 자리가 중간이고 가장 연장자 이귀가 좋은 말로 화해를 시켜서 그날은 그냥 넘어갔다. 당시 이귀는 66살 김류는 52살 이괄은 36살이었다. 이귀와 이괄은 30살 김류와 이괄은 16살 차이였다. 사실 김류에 대한 이괄의 불만은 이틀 전 반정 당일에도 있었다.
반정의 날은 광해군 15년 3월 12일이었다. 모든 반정군은 이 날 밤 2경(밤 9시-11시) 홍제원(서울 서대문구)에 모이기로 했다. 홍제원은 중국 사신이 오면 옷을 갈아입는 곳이다. 이괄과 병사 수백 명은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반정의 정보가 새서 조정에 고변했다는 것이 반정군 사이에 퍼졌다. 반정은 실패하면 역모가 된다.
역모는 당사자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과 친족까지 연좌되어 피해를 입는다. 반정을 주도한 대장 김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반정군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무엇인가 구심점이 필요했다. 이귀의 주선으로 이괄은 반정군의 새로운 대장이 된다. 반정 당일 병사들을 지휘할 반정군 대장이 김류에서 이괄로 바뀐 것이다.
이괄은 대장이 되어서 병사들을 편성하고 대오를 갖추니 병사들이 점차 안정되었다. 김류도 반정의 정보가 조정에 알려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류는 자신의 집에 기다리면서 조정에서 자신을 체포하려는 병사들이 오면 그들을 죽이고 홍제원에 가려고 했다. 그래서 시간이 지체되었던 것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