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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7일 일요일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6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6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6편

이괄은 이날 밤 왕으로 추대된 이제와 함께 서울의 동남쪽 광희문(속칭 수구문)을 통해서 서울을 빠져 나간다. 이괄을 따르는 자는 40여 명에 불과했다. 이괄과 한명련은 사흘 후 경기도 광주 경안역 근처에서 부하인 이수백, 기익헌 등에게 살해된다. 힘 빠진 대장의 비참한 말로다. 이제(李瑅)도 며칠 후 잡혀 와서 처형된다.

이괄의 반란은 2개월여 만에 진압되어 실패로 끝났다. 이괄은 난은 사실 명분이 약했다. 이괄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대한 불만, 인사(人事) 불만, 자식의 죽음에 대한 분노 등 개인감정이 더 컸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힘이 강할 때는 주변 사람들을 따르게 하지만, 그 힘이 약해질 때는 배척당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괄의 난 이후 서북지방(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의 방어력은 현저히 약해졌고, 조정은 무인들을 의심하여 집중적으로 사찰(伺察)했다. 무인들에 대한 기찰이 심해지자 무인들은 군사훈련을 기피했고, 그 후유증은 후금의 침입을 받았을 때 그대로 나타났다. 이괄(李适)의 난을 일으켰던 반란군 중 일부가 후금으로 도망쳤는데, 이때 후금으로 도망친 이괄(李适)의 부하 중 한윤은 훗날 정묘호란 때 길잡이 역할을 하는 후금의 충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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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이 살아생전 북방 방비를 잘 해두어 이것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정묘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후금은 물자 보급 및 세력 장악 등이 쉽지 않아 조선 침공이 어려웠을 것이고, 동북아에서 청이 그렇게 확장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괄의 난으로 북방 지역은 방어력이 약화되어 후금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아무도 막지 못해서 후금의 군대가 국경에서 도성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정묘, 병자호란의 단초를 만드는 계기가 바로 이괄의 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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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으로 《광해일기》와 《시정기(時政記)》의 역사를 잃어버렸다. 《시정기(時政記)》는 춘추관에서 기록한 기록물이다. 예문관 검열 김광현은 《광해일기》와 《시정기(時政記)》를 강화도로 옮기는 임무를 맡았다. 이괄의 서울 진입이 예상보다 빨라서 김광현은 수레와 말을 충분히 갖추지 못해서 기록물들을 강화도로 실어 나르지 못하고 분실했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기록물을 찾고자 상금까지 내걸었으나 회수한 것은 4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김광현은 파직(罷職) 당했다.

인조는 이괄의 난 이후 남한산성을 축조(築造)했다. 남한산성을 쌓는 데는 3천 석의 쌀로 일꾼을 사고, 벌을 주어야 할 포수나 군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열심히 한 승려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2년 만에 20리에 달하는 높은 남한산성이 완공되었다. 남한산성에는 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행궁도 지었다. 또한 삼혈총 1천 자루, 조총 1천 자루도 특별히 만들어서 보관했다. 그러나 성을 아무리 튼튼히 쌓아도 나라를 지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나라를 지키는 데는 견고한 성과 더불어 훈련된 군사, 무기, 물자에 더해서 임금과 관리, 백성들의 힘이 모아져야 했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삼십년도 안 된 시기에 서인세력은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또 정권욕에 눈이 멀어 기찰(譏察)정치나 해대면서 제대로 된 군사훈련도 못하게 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고 비극적인 일이다. 서인정권은 자기들만의 자존심과 오도된 성리학으로 인해 재조지은(再造之恩), 숭명(崇明)주의로 똘똘 뭉쳐 후금을 오랑캐라 무시하고 기어코 호란(胡亂)을 자초하여 백성을 도탄 속에 빠지게 했다. 우리나라 최악 불행의 시작이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5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5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5편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반란군의 기세에 놀란 인조는 1624 2월 8일 인조는 작은 가마를 타고 어둠을 타고 창경궁 정문 명정전을 조용히 빠져 나간다. 아주 소수의 인원이 수행하고 있었다. 피난길이다. 인조는 할아버지 선조가 궁궐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32년 만에 또 궁궐을 떠나야 했다.

할아버지 선조는 피난길을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으나 인조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괄의 반란군이 북에서 쳐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가 피난길에 오른 것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보름 만이었다. 더구나 내통의 위험이 있다는 김류의 주장으로 기자헌 외 37명의 정적(政敵)들을 몰살시키고 도망쳤다. 이후에도 인조는 두 번이나 더 수도를 버리면서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이 수도를 버린 왕으로 기억되게 된다. 인조의 피난으로 등을 돌린 민심은 이괄을 지지하여 한양입성에 성공했다.

이괄은 파죽지세로 2월 9일 서울로 진입했다. 이괄은 반란군으로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을 점령했다. 난을 일으킨 지 22일만이었다. 이괄은 경복궁 옛 터에 주둔했다. 이괄은 선조의 6번째 후궁 은빈 한 씨의 장남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도성 안의 사람들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고 방을 붙였다.

이제(李瑅)는 왕으로 추대되어 관직을 제수하기도 했다. 이괄의 난은 서울을 점령하고서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관군은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관군이 선택한 최후의 결전 장소는 안현(鞍峴)이었다. 안현은 서울의 서대문구 길마재, 즉 무악재이다. 도원수 장만은 계속 패해서 반란군을 성안에까지 들어오게 했고, 왕을 피난길에 오르게 해서 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다른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관군의 장수들은 죽을 각오로 싸워서 이겨야 했다.

안주목사 정충신은 “병법에 북쪽 산을 차지한 자가 이긴다. 우리가 무악재를 점거해서 진을 치면 우리는 도성을 내려다보고 싸우고 적은 올려다보면서 싸워야 함으로 우리가 유리하다.”라고 계책을 올렸다. 이괄의 반란군에서 탈출한 중군 남이흥도 적극 찬성했다. 정충신도 남이흥과 같이 이괄의 반란군에서 탈출한 인물이다.

이괄은 관군의 배치 상황을 보고 도원수와 관군의 정예병이 따로 있으니 단번에 도원수를 사로잡으면 군의 사기가 떨어지니 이길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이괄의 군은 그동안 거침없이 진군해서 싸우지 않아도 관군을 패주시킬 수 있다는 자만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날의 싸움은 관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 요인은 유리한 지형과 날씨였다.

전투는 묘시(卯時:새벽 5시~7시)에서 자시(子時:오전 9시~11시)까지 벌어졌다. 이괄의 군은 화살과 탄환을 비 오듯 퍼부었으나, 산꼭대기에 있는 관군에 미치지 못하였다. 또한, 싸움이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바람의 방향이 관군에게 유리한 서북풍이 세게 불어 반란군의 얼굴에 모래먼지가 휘몰아쳤다. 반란군의 장군 이양(李壤)이 총에 맞아서 죽고 한명련도 화살에 맞았으며, 이괄의 대장기(大將旗)도 후퇴의 조짐이 보였다. 반란군은 서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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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4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4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4편

황주 싸움은 백병전이었다. 처음에는 이괄의 군에서 투항하는 자가 나와서 관군이 우세한 듯으로 보였으나, 곧 분위기는 반전됐다. 이괄의 군에서 맹활약을 한 것은 130여 명의 항복한 왜군이었다. 이들이 칼을 들고 돌진하자 관군은 순식간에 흩어져 달아났다. 관군에서도 용감한 자는 있었다. 박영서였다. 그는 무과에 합격해서 평안도 창성부사가 되었으며,

이괄 진압군의 선봉장이 되었다. 관군이 겁을 먹고 진격을 못하자 그는 말을 타고 홀로 용맹하게 이괄의 진중으로 뛰어 들었다. 그는 이괄을 잡을 뻔 했으나 바로 직전 그의 말(馬)이 거꾸러져 도로 이괄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괄은 그의 용감함을 높이 사서 자신의 진영에 두고자 했다.

박영서는 자신이 잡힌 것은 말 때문이라고 하면서 말을 베고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반란군의 잘못을 꾸짖었다고 한다. 인조는 그의 용감함을 듣고 탄식하면서 병조판서로 증직(贈職)한다. 후일 영조는 그에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까지 내려 주었다.

이 날은 관군의 참패였다. 도원수 장만은 패배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다시 재기하겠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관군은 황주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반란군의 서울 진입은 막아야 했다. 다시 저지선을 펼쳤다. 관군의 방어선은 황해도 평산 의 마탄이었다. 마탄은 예성강 상류이다. 관군은 여울목을 지키고 있었다.

도원수 장만은 평산의 군사와 합류해야 했으므로 군사들을 쉼 없이 행군시켰다. 이괄의 군은 낮은 여울목을 건너서 관군을 급습했다. 관군은 우왕좌왕 한꺼번에 무너졌다. 많은 관군이 물에 빠져 죽거나 반란군에게 항복했다. 관군은 쉼 없는 장거리 행군으로 지쳐있었고 식량도 부족해서 굶주린 자가 많았으며, 도망자도 속출하고 있었다. 관군은 이미 사기가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방어사 이중로, 이성부 등 지휘관들도 다수 전사했다.

평산의 패배가 전해진 이 날 밤, 조정은 왕실의 피난을 논의한다. 공주산성이 거론되었다. 공주산성은 앞에 큰 강이 있어서 방어에 유리하고 서울에서 멀지 않은 것이 이유였다. 또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외교문서를 보내고 의병도 모집하기로 했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30년도 채 안되었으나 나라가 바뀐 것은 없었다. 왕의 피난과 중국(명)에 구원 요청, 의병모집은 임진왜란 때에 관군이 허약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관군의 그 다음 방어선은 임진강이었다. 경기감사 이서가 개성의 청석동을 방어했으나, 여기서도 밤을 틈타 기습한 이괄의 군에 속한 항복한 왜군 수십 명에게 무너졌다. 그 다음 수원부사 이흥립과 파주목사 박효립을 임진강의 위아래를 방어하게 했다. 이흥립은 3천의 군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괄의 반란군에 합류하고 말았다. 이흥립은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다.

국가로부터 상당한 혜택을 받은 1등 공신이 인조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후일 이괄의 진압 후 이흥립은 투옥되어 감옥에서 자살한다. 박효립도 인조반정의 2등 공신이다. 박효립은 훈련받지 않은 민병 수백 명을 데리고 있었으나 이괄의 군을 보자 달아났다. 공신들이 왕에게 등을 돌리고 충성을 다하지 않은 것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관군의 임진강 방어는 방어가 아니었다. 허망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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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3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3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3편

이괄은 군사 1만 2천명과 항복한 왜인 130 명을 데리고 엄동설한임에도 군사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괄은 “나는 외아들밖에 없다. 아들이 잡혀가서 죽음을 당할 것이니 그 아비가 온전하겠는가. 잡혀서 죽으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음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머리를 숙이고 죽고 싶지는 않다.”라고 하면서 지휘관들을 불러 모았다.

이괄은 군사를 성안에 포진시키고 임금의 사자들이 뜰에 도착하자 장교를 시켜서 그들을 죽인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는 신호탄이다. 인조 2년 1월 24일이었다. 이괄은 진격의 나팔을 울렸다. 그 목적지는 인조가 있는 창경궁이다.

인조는 이괄의 반란 후 즉시 팔도에 군사를 징발하게 하고 이괄을 베는 자는 상당한 보상을 약속했으며, 관서지방의 인심을 달래기 위한 대책으로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임명해서 파견하기로 했다. 도체찰사는 전쟁 등 비상시에 군정을 맡는 임시의 최고 책임자다. 이원익은 평안도관찰사와 평양감사를 각각 역임해서 그 지역 사정에 밝았다. 이원익은 현지에 가서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반란을 깨우치고 백성들을 달래려고 했으나 그는 당시 77세의 병든 몸이라 현지에 가지는 못했다. 이괄의 반란군을 진압할 책임자는 도원수 장만이었다.

이괄의 반란군은 1만 수천여 명으로 이미 거침없이 인조가 있는 서울로 남하하고 있었다. 장만은 직할 군대가 없었으므로 군사를 모아야 했다. 며칠 동안 수천 명을 모을 수 있었다. 장만이 병사를 모으고 움직일 수 있기까지는 시일이 걸렸음으로 이괄의 반란군을 뒤쫓아 가는 형국이었다. 첫 번째 승리는 의외로 장만에게 돌아갔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4일 후 장만은 간첩을 활용한 지략을 펼친다.

이괄의 반란군에는 강압에 못 이겨서 난에 참가한 장군들이 있었다. 자신의 뜻에 상관없이 반란군이 된 안주목사 정충신, 중군(中軍) 남이흥 등은 목숨을 걸고 반란군에서 탈출해 장만의 진영으로 왔다. 장만은 숫자가 적은 자신의 군대로 반란군을 이길 방도를 궁리하고 있었다. 이 때 반란군에서 탈출한 남이흥은 반란군에는 탈출하고자 하는 장군들이 더 있다고 장만에게 보고했다. 장만은 그 장군들과 연락을 취해야 했다. 광해군 대에 성진첨사를 지낸 이윤서의 종 효생이 적임자로 선택되었다. 이윤서는 반란군의 장군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장만은 효생에게 적진으로 가서 이윤서에게 자신의 편지를 전하면 큰 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윤서의 종 효생은 “제가 이 글을 전함으로서 제 주인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제가 어찌 재물을 받겠습니까.”라며 편지를 성공적으로 전했다. 이윤수 등 4명의 장군이 반란군에서 탈출해서 장만의 진영에 귀순하고 그들이 거느린 4천 여 명의 군사는 각자의 갈 길로 갔다.

효생이 비록 미천한 신분의 종이었지만, 4천 여 명의 반란군을 흩어지게 한 것이다. 이괄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지만 아직 그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괄은 장만의 군사와 가능한 마주치지 않고 열흘 만에 황해도 황주까지 내려왔다. 지금까지는 관군의 저항이 별로 없었다. 황주는 서북쪽 방어를 위한 중요한 관문이었다. 관군의 1차 저지선이 된다. 이괄의 군과 정부군이 이곳에서 군사적으로 맞닥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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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2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2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2편

이괄은 늦게 도착한 김류를 병법에 의거해서 죽이고자 했다. 김류는 약속한 시간보다 너무 일찍 온 자를 참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괄과 김류, 두 사람 사이에서 일촉즉발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이 또한 연장자 이귀가 화해시켰다. 이괄은 반정 3개월 전 광해군으로부터 북병사(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제수 되었으나 현지로 부임하지 않았다.

인조는 북쪽 방어의 중요성을 감안해서 반정이후 이괄을 그대로 북병사로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김류와 이귀가 이를 반대한다. 김류와 이귀는 이괄의 능력과 반정에 참여한 공을 감안해서 서울에 두어야 한다고 건의한다. 김류는 이괄과 다투기는 했으나 그의 능력을 평가한 것이다. 혹은 이괄이 변방에 나가서 세력을 키워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이미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정 후, 이괄은 좌포도대장으로 왕의 경호를 거쳐서 판윤이 된다. 판윤은 정2품으로 한성부의 으뜸벼슬이고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한다. 김류는 병조참판, 이귀는 이조참판이 되었다. 참판은 종2품이다. 벼슬등급은 이괄이 두 사람보다 한 품 위이지만, 김류와 이귀는 군과 인사의 핵심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이괄은 임금에게 자신은 공이 없다고 하면서 판윤을 사직한다. 이것은 앞서 이귀가 이괄을 병조판서로 추천했는데 병조판서가 안 된 것에 대한 불만의 표시일지도 모른다. 이괄은 도원수 장만의 추천으로 평안병사 겸 부원수가 된다. 장만은 평양에 사령부를 개설한 총괄적 지휘자였으나 그 병력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장수는 영변에 군사기지의 하나인 진(鎭)을 설치한 이괄이었다.

장만은 도원수이지만 직할 병력은 없었고 이괄은 부원수로서 영변진을 지키는 1만 수천 명을 움직일 수 있었다. 당시 서북 방어는 중요했다. 오랑캐(청나라)의 침입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괄은 외직으로 나가는 것은 불만이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괄은 인조에게 자신에게 맡겨진 중임을 은혜로 갚을 것을 맹세한다. 다만 이괄은 1만 5천의 병력은 부족하다고 하면서 군사를 더 달라고 건의했다. 인조는 이괄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전라도 군사를 더 보낸다.

이괄이 왕에게 군사를 더 달라고 한 것은 내심 반란의 심중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괄은 인조반정 이후부터 불만을 갖고 반란군의 핵심이 되는 한명련, 정충신과 자주 모여서 시국을 이야기 했고, 그의 외아들 이전(李栴)은 정돈, 정찬과 함께 산을 유람한다는 핑계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같이 일을 한 사람들과 친분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괄이 일으킨 반란의 결정적인 기폭제는 인사(人事) 불만과 녹훈(錄勳)이었다. 녹훈은 신하의 공을 문서에 기록하는 것이다. 공신은 국가로부터 등수에 따라서 땅과 노비 등의 재산을 받고, 그 자제는 음직(蔭職:음서)의 혜택을 본다. 음직은 조선에서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커다란 혜택이었다. 이괄이 임지로 떠난 5개월 후 녹훈이 발표되었다. 녹훈을 주도한 것은 김류와 이귀였다. 김류와 이귀는 인조와 3년 전부터 반정을 모의한 두 축이었고, 전 과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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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1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1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1편

인조는 즉위 10개월 만에 커다란 위기를 맞이한다. 1624년 1월에 일어난 ‘이괄의 난’은 인조반정의 명분에 큰 오점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인조는 반정을 같이 한 평안병사 겸 부원수 이괄이 병사 수만 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다는 고변을 듣고도 처음에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인조는 도원수 장만과 부원수 이괄이 서북 방어를 위해서 현지로 떠날 때 모화관까지 가서 친히 전송을 했고, 어도(御刀)를 내려주며 수레바퀴를 밀어줄 정도로 애정과 신뢰를 보냈기 때문이다.

좌찬성 이귀는 이괄이 반역을 한다는 고변서(告變書)를 근거로 이괄을 잡아서 국문할 것을 청했다. 인조는 “이괄은 충성스러운 사람인데 어찌 반역을 하겠는가?”라고 이귀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날 사헌부 사간원에서도 이괄을 체포해서 국문할 것을 청했다. 인조는 “이괄은 충성스러운 신하”라고 다시 강조하면서 “이괄이 아니면 부원수의 직임을 맡을 수 없으니 두 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라고 여전히 이괄의 충성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괄은 무과로 합격했으나 글을 잘하고 글씨도 잘 써서 명성이 있었다. 인조가 이괄에게 이렇게 무한 신뢰를 보내고 있을 때, 이괄은 반란의 모든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괄은 왜 반란을 일으켰을까?

인조는 반정을 성공한 이틀 후 반정에 참여한 장수와 병졸들을 모화관으로 초청해서 위로의 잔치를 벌였다. 이 때 자리배치가 이괄의 심기를 건드렸다. 상석(上席)에 해당하는 맨 위쪽은 김류 그 다음은 이귀, 이괄의 순이었다. 이괄은 자신의 자리가 김류 아래에 있는 것에 분노해서 눈으로 흘겨보았다. 자리가 중간이고 가장 연장자 이귀가 좋은 말로 화해를 시켜서 그날은 그냥 넘어갔다. 당시 이귀는 66살 김류는 52살 이괄은 36살이었다. 이귀와 이괄은 30살 김류와 이괄은 16살 차이였다. 사실 김류에 대한 이괄의 불만은 이틀 전 반정 당일에도 있었다.

반정의 날은 광해군 15년 3월 12일이었다. 모든 반정군은 이 날 밤 2경(밤 9시-11시) 홍제원(서울 서대문구)에 모이기로 했다. 홍제원은 중국 사신이 오면 옷을 갈아입는 곳이다. 이괄과 병사 수백 명은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반정의 정보가 새서 조정에 고변했다는 것이 반정군 사이에 퍼졌다. 반정은 실패하면 역모가 된다.

역모는 당사자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과 친족까지 연좌되어 피해를 입는다. 반정을 주도한 대장 김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반정군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무엇인가 구심점이 필요했다. 이귀의 주선으로 이괄은 반정군의 새로운 대장이 된다. 반정 당일 병사들을 지휘할 반정군 대장이 김류에서 이괄로 바뀐 것이다.

이괄은 대장이 되어서 병사들을 편성하고 대오를 갖추니 병사들이 점차 안정되었다. 김류도 반정의 정보가 조정에 알려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류는 자신의 집에 기다리면서 조정에서 자신을 체포하려는 병사들이 오면 그들을 죽이고 홍제원에 가려고 했다. 그래서 시간이 지체되었던 것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