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3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3편
이괄은 군사 1만 2천명과 항복한 왜인 130 명을 데리고 엄동설한임에도 군사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괄은 “나는 외아들밖에 없다. 아들이 잡혀가서 죽음을 당할 것이니 그 아비가 온전하겠는가. 잡혀서 죽으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음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머리를 숙이고 죽고 싶지는 않다.”라고 하면서 지휘관들을 불러 모았다.
이괄은 군사를 성안에 포진시키고 임금의 사자들이 뜰에 도착하자 장교를 시켜서 그들을 죽인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는 신호탄이다. 인조 2년 1월 24일이었다. 이괄은 진격의 나팔을 울렸다. 그 목적지는 인조가 있는 창경궁이다.
인조는 이괄의 반란 후 즉시 팔도에 군사를 징발하게 하고 이괄을 베는 자는 상당한 보상을 약속했으며, 관서지방의 인심을 달래기 위한 대책으로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임명해서 파견하기로 했다. 도체찰사는 전쟁 등 비상시에 군정을 맡는 임시의 최고 책임자다. 이원익은 평안도관찰사와 평양감사를 각각 역임해서 그 지역 사정에 밝았다. 이원익은 현지에 가서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반란을 깨우치고 백성들을 달래려고 했으나 그는 당시 77세의 병든 몸이라 현지에 가지는 못했다. 이괄의 반란군을 진압할 책임자는 도원수 장만이었다.
이괄의 반란군은 1만 수천여 명으로 이미 거침없이 인조가 있는 서울로 남하하고 있었다. 장만은 직할 군대가 없었으므로 군사를 모아야 했다. 며칠 동안 수천 명을 모을 수 있었다. 장만이 병사를 모으고 움직일 수 있기까지는 시일이 걸렸음으로 이괄의 반란군을 뒤쫓아 가는 형국이었다. 첫 번째 승리는 의외로 장만에게 돌아갔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4일 후 장만은 간첩을 활용한 지략을 펼친다.
이괄의 반란군에는 강압에 못 이겨서 난에 참가한 장군들이 있었다. 자신의 뜻에 상관없이 반란군이 된 안주목사 정충신, 중군(中軍) 남이흥 등은 목숨을 걸고 반란군에서 탈출해 장만의 진영으로 왔다. 장만은 숫자가 적은 자신의 군대로 반란군을 이길 방도를 궁리하고 있었다. 이 때 반란군에서 탈출한 남이흥은 반란군에는 탈출하고자 하는 장군들이 더 있다고 장만에게 보고했다. 장만은 그 장군들과 연락을 취해야 했다. 광해군 대에 성진첨사를 지낸 이윤서의 종 효생이 적임자로 선택되었다. 이윤서는 반란군의 장군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장만은 효생에게 적진으로 가서 이윤서에게 자신의 편지를 전하면 큰 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윤서의 종 효생은 “제가 이 글을 전함으로서 제 주인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제가 어찌 재물을 받겠습니까.”라며 편지를 성공적으로 전했다. 이윤수 등 4명의 장군이 반란군에서 탈출해서 장만의 진영에 귀순하고 그들이 거느린 4천 여 명의 군사는 각자의 갈 길로 갔다.
효생이 비록 미천한 신분의 종이었지만, 4천 여 명의 반란군을 흩어지게 한 것이다. 이괄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지만 아직 그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괄은 장만의 군사와 가능한 마주치지 않고 열흘 만에 황해도 황주까지 내려왔다. 지금까지는 관군의 저항이 별로 없었다. 황주는 서북쪽 방어를 위한 중요한 관문이었다. 관군의 1차 저지선이 된다. 이괄의 군과 정부군이 이곳에서 군사적으로 맞닥뜨린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