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2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2편
이괄은 늦게 도착한 김류를 병법에 의거해서 죽이고자 했다. 김류는 약속한 시간보다 너무 일찍 온 자를 참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괄과 김류, 두 사람 사이에서 일촉즉발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이 또한 연장자 이귀가 화해시켰다. 이괄은 반정 3개월 전 광해군으로부터 북병사(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제수 되었으나 현지로 부임하지 않았다.
인조는 북쪽 방어의 중요성을 감안해서 반정이후 이괄을 그대로 북병사로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김류와 이귀가 이를 반대한다. 김류와 이귀는 이괄의 능력과 반정에 참여한 공을 감안해서 서울에 두어야 한다고 건의한다. 김류는 이괄과 다투기는 했으나 그의 능력을 평가한 것이다. 혹은 이괄이 변방에 나가서 세력을 키워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이미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정 후, 이괄은 좌포도대장으로 왕의 경호를 거쳐서 판윤이 된다. 판윤은 정2품으로 한성부의 으뜸벼슬이고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한다. 김류는 병조참판, 이귀는 이조참판이 되었다. 참판은 종2품이다. 벼슬등급은 이괄이 두 사람보다 한 품 위이지만, 김류와 이귀는 군과 인사의 핵심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이괄은 임금에게 자신은 공이 없다고 하면서 판윤을 사직한다. 이것은 앞서 이귀가 이괄을 병조판서로 추천했는데 병조판서가 안 된 것에 대한 불만의 표시일지도 모른다. 이괄은 도원수 장만의 추천으로 평안병사 겸 부원수가 된다. 장만은 평양에 사령부를 개설한 총괄적 지휘자였으나 그 병력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장수는 영변에 군사기지의 하나인 진(鎭)을 설치한 이괄이었다.
장만은 도원수이지만 직할 병력은 없었고 이괄은 부원수로서 영변진을 지키는 1만 수천 명을 움직일 수 있었다. 당시 서북 방어는 중요했다. 오랑캐(청나라)의 침입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괄은 외직으로 나가는 것은 불만이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괄은 인조에게 자신에게 맡겨진 중임을 은혜로 갚을 것을 맹세한다. 다만 이괄은 1만 5천의 병력은 부족하다고 하면서 군사를 더 달라고 건의했다. 인조는 이괄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전라도 군사를 더 보낸다.
이괄이 왕에게 군사를 더 달라고 한 것은 내심 반란의 심중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괄은 인조반정 이후부터 불만을 갖고 반란군의 핵심이 되는 한명련, 정충신과 자주 모여서 시국을 이야기 했고, 그의 외아들 이전(李栴)은 정돈, 정찬과 함께 산을 유람한다는 핑계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같이 일을 한 사람들과 친분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괄이 일으킨 반란의 결정적인 기폭제는 인사(人事) 불만과 녹훈(錄勳)이었다. 녹훈은 신하의 공을 문서에 기록하는 것이다. 공신은 국가로부터 등수에 따라서 땅과 노비 등의 재산을 받고, 그 자제는 음직(蔭職:음서)의 혜택을 본다. 음직은 조선에서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커다란 혜택이었다. 이괄이 임지로 떠난 5개월 후 녹훈이 발표되었다. 녹훈을 주도한 것은 김류와 이귀였다. 김류와 이귀는 인조와 3년 전부터 반정을 모의한 두 축이었고, 전 과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