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4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4편
황주 싸움은 백병전이었다. 처음에는 이괄의 군에서 투항하는 자가 나와서 관군이 우세한 듯으로 보였으나, 곧 분위기는 반전됐다. 이괄의 군에서 맹활약을 한 것은 130여 명의 항복한 왜군이었다. 이들이 칼을 들고 돌진하자 관군은 순식간에 흩어져 달아났다. 관군에서도 용감한 자는 있었다. 박영서였다. 그는 무과에 합격해서 평안도 창성부사가 되었으며,
이괄 진압군의 선봉장이 되었다. 관군이 겁을 먹고 진격을 못하자 그는 말을 타고 홀로 용맹하게 이괄의 진중으로 뛰어 들었다. 그는 이괄을 잡을 뻔 했으나 바로 직전 그의 말(馬)이 거꾸러져 도로 이괄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괄은 그의 용감함을 높이 사서 자신의 진영에 두고자 했다.
박영서는 자신이 잡힌 것은 말 때문이라고 하면서 말을 베고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반란군의 잘못을 꾸짖었다고 한다. 인조는 그의 용감함을 듣고 탄식하면서 병조판서로 증직(贈職)한다. 후일 영조는 그에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까지 내려 주었다.
이 날은 관군의 참패였다. 도원수 장만은 패배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다시 재기하겠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관군은 황주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반란군의 서울 진입은 막아야 했다. 다시 저지선을 펼쳤다. 관군의 방어선은 황해도 평산 의 마탄이었다. 마탄은 예성강 상류이다. 관군은 여울목을 지키고 있었다.
도원수 장만은 평산의 군사와 합류해야 했으므로 군사들을 쉼 없이 행군시켰다. 이괄의 군은 낮은 여울목을 건너서 관군을 급습했다. 관군은 우왕좌왕 한꺼번에 무너졌다. 많은 관군이 물에 빠져 죽거나 반란군에게 항복했다. 관군은 쉼 없는 장거리 행군으로 지쳐있었고 식량도 부족해서 굶주린 자가 많았으며, 도망자도 속출하고 있었다. 관군은 이미 사기가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방어사 이중로, 이성부 등 지휘관들도 다수 전사했다.
평산의 패배가 전해진 이 날 밤, 조정은 왕실의 피난을 논의한다. 공주산성이 거론되었다. 공주산성은 앞에 큰 강이 있어서 방어에 유리하고 서울에서 멀지 않은 것이 이유였다. 또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외교문서를 보내고 의병도 모집하기로 했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30년도 채 안되었으나 나라가 바뀐 것은 없었다. 왕의 피난과 중국(명)에 구원 요청, 의병모집은 임진왜란 때에 관군이 허약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관군의 그 다음 방어선은 임진강이었다. 경기감사 이서가 개성의 청석동을 방어했으나, 여기서도 밤을 틈타 기습한 이괄의 군에 속한 항복한 왜군 수십 명에게 무너졌다. 그 다음 수원부사 이흥립과 파주목사 박효립을 임진강의 위아래를 방어하게 했다. 이흥립은 3천의 군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괄의 반란군에 합류하고 말았다. 이흥립은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다.
국가로부터 상당한 혜택을 받은 1등 공신이 인조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후일 이괄의 진압 후 이흥립은 투옥되어 감옥에서 자살한다. 박효립도 인조반정의 2등 공신이다. 박효립은 훈련받지 않은 민병 수백 명을 데리고 있었으나 이괄의 군을 보자 달아났다. 공신들이 왕에게 등을 돌리고 충성을 다하지 않은 것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관군의 임진강 방어는 방어가 아니었다. 허망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