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5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5편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반란군의 기세에 놀란 인조는 1624 2월 8일 인조는 작은 가마를 타고 어둠을 타고 창경궁 정문 명정전을 조용히 빠져 나간다. 아주 소수의 인원이 수행하고 있었다. 피난길이다. 인조는 할아버지 선조가 궁궐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32년 만에 또 궁궐을 떠나야 했다.
할아버지 선조는 피난길을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으나 인조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괄의 반란군이 북에서 쳐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가 피난길에 오른 것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보름 만이었다. 더구나 내통의 위험이 있다는 김류의 주장으로 기자헌 외 37명의 정적(政敵)들을 몰살시키고 도망쳤다. 이후에도 인조는 두 번이나 더 수도를 버리면서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이 수도를 버린 왕으로 기억되게 된다. 인조의 피난으로 등을 돌린 민심은 이괄을 지지하여 한양입성에 성공했다.
이괄은 파죽지세로 2월 9일 서울로 진입했다. 이괄은 반란군으로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을 점령했다. 난을 일으킨 지 22일만이었다. 이괄은 경복궁 옛 터에 주둔했다. 이괄은 선조의 6번째 후궁 은빈 한 씨의 장남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도성 안의 사람들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고 방을 붙였다.
이제(李瑅)는 왕으로 추대되어 관직을 제수하기도 했다. 이괄의 난은 서울을 점령하고서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관군은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관군이 선택한 최후의 결전 장소는 안현(鞍峴)이었다. 안현은 서울의 서대문구 길마재, 즉 무악재이다. 도원수 장만은 계속 패해서 반란군을 성안에까지 들어오게 했고, 왕을 피난길에 오르게 해서 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다른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관군의 장수들은 죽을 각오로 싸워서 이겨야 했다.
안주목사 정충신은 “병법에 북쪽 산을 차지한 자가 이긴다. 우리가 무악재를 점거해서 진을 치면 우리는 도성을 내려다보고 싸우고 적은 올려다보면서 싸워야 함으로 우리가 유리하다.”라고 계책을 올렸다. 이괄의 반란군에서 탈출한 중군 남이흥도 적극 찬성했다. 정충신도 남이흥과 같이 이괄의 반란군에서 탈출한 인물이다.
이괄은 관군의 배치 상황을 보고 도원수와 관군의 정예병이 따로 있으니 단번에 도원수를 사로잡으면 군의 사기가 떨어지니 이길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이괄의 군은 그동안 거침없이 진군해서 싸우지 않아도 관군을 패주시킬 수 있다는 자만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날의 싸움은 관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 요인은 유리한 지형과 날씨였다.
전투는 묘시(卯時:새벽 5시~7시)에서 자시(子時:오전 9시~11시)까지 벌어졌다. 이괄의 군은 화살과 탄환을 비 오듯 퍼부었으나, 산꼭대기에 있는 관군에 미치지 못하였다. 또한, 싸움이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 바람의 방향이 관군에게 유리한 서북풍이 세게 불어 반란군의 얼굴에 모래먼지가 휘몰아쳤다. 반란군의 장군 이양(李壤)이 총에 맞아서 죽고 한명련도 화살에 맞았으며, 이괄의 대장기(大將旗)도 후퇴의 조짐이 보였다. 반란군은 서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