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7일 일요일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6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6편

■ 이괄, 반란을 일으키다 6편

이괄은 이날 밤 왕으로 추대된 이제와 함께 서울의 동남쪽 광희문(속칭 수구문)을 통해서 서울을 빠져 나간다. 이괄을 따르는 자는 40여 명에 불과했다. 이괄과 한명련은 사흘 후 경기도 광주 경안역 근처에서 부하인 이수백, 기익헌 등에게 살해된다. 힘 빠진 대장의 비참한 말로다. 이제(李瑅)도 며칠 후 잡혀 와서 처형된다.

이괄의 반란은 2개월여 만에 진압되어 실패로 끝났다. 이괄은 난은 사실 명분이 약했다. 이괄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대한 불만, 인사(人事) 불만, 자식의 죽음에 대한 분노 등 개인감정이 더 컸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힘이 강할 때는 주변 사람들을 따르게 하지만, 그 힘이 약해질 때는 배척당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괄의 난 이후 서북지방(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의 방어력은 현저히 약해졌고, 조정은 무인들을 의심하여 집중적으로 사찰(伺察)했다. 무인들에 대한 기찰이 심해지자 무인들은 군사훈련을 기피했고, 그 후유증은 후금의 침입을 받았을 때 그대로 나타났다. 이괄(李适)의 난을 일으켰던 반란군 중 일부가 후금으로 도망쳤는데, 이때 후금으로 도망친 이괄(李适)의 부하 중 한윤은 훗날 정묘호란 때 길잡이 역할을 하는 후금의 충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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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이 살아생전 북방 방비를 잘 해두어 이것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정묘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후금은 물자 보급 및 세력 장악 등이 쉽지 않아 조선 침공이 어려웠을 것이고, 동북아에서 청이 그렇게 확장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괄의 난으로 북방 지역은 방어력이 약화되어 후금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아무도 막지 못해서 후금의 군대가 국경에서 도성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정묘, 병자호란의 단초를 만드는 계기가 바로 이괄의 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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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으로 《광해일기》와 《시정기(時政記)》의 역사를 잃어버렸다. 《시정기(時政記)》는 춘추관에서 기록한 기록물이다. 예문관 검열 김광현은 《광해일기》와 《시정기(時政記)》를 강화도로 옮기는 임무를 맡았다. 이괄의 서울 진입이 예상보다 빨라서 김광현은 수레와 말을 충분히 갖추지 못해서 기록물들을 강화도로 실어 나르지 못하고 분실했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기록물을 찾고자 상금까지 내걸었으나 회수한 것은 4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김광현은 파직(罷職) 당했다.

인조는 이괄의 난 이후 남한산성을 축조(築造)했다. 남한산성을 쌓는 데는 3천 석의 쌀로 일꾼을 사고, 벌을 주어야 할 포수나 군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열심히 한 승려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2년 만에 20리에 달하는 높은 남한산성이 완공되었다. 남한산성에는 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행궁도 지었다. 또한 삼혈총 1천 자루, 조총 1천 자루도 특별히 만들어서 보관했다. 그러나 성을 아무리 튼튼히 쌓아도 나라를 지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나라를 지키는 데는 견고한 성과 더불어 훈련된 군사, 무기, 물자에 더해서 임금과 관리, 백성들의 힘이 모아져야 했다. 임진왜란을 겪은 지 삼십년도 안 된 시기에 서인세력은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또 정권욕에 눈이 멀어 기찰(譏察)정치나 해대면서 제대로 된 군사훈련도 못하게 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고 비극적인 일이다. 서인정권은 자기들만의 자존심과 오도된 성리학으로 인해 재조지은(再造之恩), 숭명(崇明)주의로 똘똘 뭉쳐 후금을 오랑캐라 무시하고 기어코 호란(胡亂)을 자초하여 백성을 도탄 속에 빠지게 했다. 우리나라 최악 불행의 시작이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