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補와 흉배胸背 1편
■ 보(補)와 흉배(胸背) 1편
흉배(胸背)는 조선시대에 왕과 왕실, 문무관(文武官)이 평상시 집무복인 상복(常服)에 사용하는 장식물이다. 무늬가 있는 직물에 품계(品階)에 따라 신분을 상징하는 무늬를 다채롭게 수놓아 상하계급을 뚜렷하게 구별함과 동시에 의복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역할도 했다. 흉배는 문관·무관의 구별과 상·하를 구분하는 것 뿐 아니라 특정 직책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대사헌은 선과 악을 판단하는 상상의 동물인 해치 흉배를 사용했다. 흉배제도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 정치의 기준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흉배착용에 대한 논의가 거듭되었던 기록을 담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함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속대전(續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에서 확인된다.
흉배(胸背)는 세종28년(1446년)에 관품 구별을 위해 제정을 논의했으나, 그 재료가 단(緞:비단)과 사라(紗羅:견직물)이므로 검박한 생활과 사치억제를 위해 제정을 그만두었다가, 단종 2년(1454년) 명나라의 문양제도를 따라 문·무관 3품 이상의 일상복에 흉배를 붙이게 되었다. 초기에는 명의 것을 기반으로 제정되었으나 연산군 때 우리 고유의 특성이 반영된 무늬를 다양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왕과 왕비, 왕세자, 왕세손의 평상복인 곤룡포에는 용을 수놓은 흉배를 가슴과 등 그리고 양어깨 4군데에 달았는데, 이를 특별히 보(補)라고 한다. 신하들의 사각형 횽배와 달리 특별히 둥글게 만들어 졌다. 이는 왕실은 만백성의 하늘이기에 하늘을 상징하는 동그란 모양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왕과 왕비는 발가락이 5개인 원형의 오조룡보(五爪龍補)를, 왕세자와 그 빈은 발가락이 4개인 원형의 사조룡보(四爪龍補)를, 그리고 왕세손은 발가락이 3개인 사각형의 삼조룡보(三爪龍補)를 사용하였다.
백관들이 입는 일상복인 단령포(團領袍)에는 네모진 흉배를 가슴과 등 두 군데에 붙였다. 보와 흉배의 문양은 용·봉·기린·사자·백택·공작·운학·백한·호표·웅비·해치 등이며, 그 상징하는 의미가 깊다.
계급의 표시가 되는 도안은 수정을 거듭하다가 조선 말기 고종 8년(1871년) 제정된 제도에서는 학(鶴)과 호랑이(虎)로 정리되어, 문관 당상관은 쌍학(鶴), 당하관은 단학, 무관 당상관은 쌍호(虎), 무관 당하관은 단호로 정해졌다. 학과 호랑이는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을 대표하는 동물로서 학은 구름과 어우러져서 장수와 고아한 선비의 기상을 상징하며, 호랑이는 용맹함과 날렵함으로 절대적인 권위와 힘을 상징한다.
왕족들은 기린(麒麟), 백택(白澤), 봉황(鳳凰) 등을 수놓은 네모 모양의 흉배를 가슴과 등 두 군데에 달았는데, 대군(大君)은 기린, 왕자(王子)와 군(君)은 백택을 사용했다. 흥선대원군의 기린흉배 역시 대군의 예를 따른 것이다(흥선대원군은 고종 32년(1895)년부터 기린흉배를 거북흉배로 바꾸어 사용함).
봉황은 왕비의 평상 예복과 공주, 옹주가 사용하였다. 왕비의 봉황흉배는 봉황 밑에 물결과 바위무늬가 있는데, 공주와 옹주의 봉황흉배는 봉황과 구름만 있는 것으로 그 차이를 두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