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2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2편
윤희순은 조선말의 대학자였던 화서(華西) 이항로(1792~1868)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윤익상과 평해 황씨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1506년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이었던 윤희평을 자랑으로 삼는 가문이다. 윤희평은 뛰어난 무인(武人)으로 1510년 삼포왜란을 평정한 공으로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아마도 윤희순은 조상의 이런 장수(將帥) 기질과 DNA를 물려받은 듯하다. 윤희순 주위의 인물들은 1866년 병인양요 때 주전론(主戰論)을 펼쳤고, 대원군에 맞섰던 강직한 지식인 이항로의 위정척사론을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항로의 가르침이 그녀의 삶에도 깊이 스며들었다. 윤희순이 시집간 해는 그녀가 16세이던 1876년. 해안측량을 구실로 조선의 해안을 넘나 들던 일본 군함 운요호를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 조선 수비병이 발포하자, 일본은 이를 빌미로 개항을 요구했다. 강화도에서 굴욕적인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이른바 ‘강화도조약’이 맺어지고, 우리나라는 강제 개항을 했다. 강화도조약은 우리나라의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었다.
춘천시 남면 발산리에서 산자락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며 살던 고흥 유씨 집에 한양에서 새색시를 태운 꽃가마가 도착했다. 그런데 잔칫집에 큰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저녁이 되자 동네 아낙들이 새댁 구경을 한다고 관솔불을 켜서 들고 왔는데, 초가 처마 끝에 불이 붙어 화재가 난 것이다. 불길이 거센 가운데 시아버지 유홍석은 신방에 있던 신부 윤희순을 번쩍 들어 안고는 집 바깥에 있는 보리밭으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새색시답게 가만히 앉아있지 않고 족두리와 저고리를 벗어던지고 불을 끄러 달려갔다고 한다.
남편 유제원은 결혼 후에도 여전히 학문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집을 줄곧 비웠다. 어린 신부는 첫날밤의 화재로 불 냄새가 나는 집에서 그녀는 늘 독수공방이었다. 거기다가 나라는 강제로 개항하여 외세(外勢) 앞에 풍전등화(風前燈火) 처지였다. 오랫동안 아이도 없었다. 외로운 가운데 무심한 세월이 흘러, 그녀가 첫 아이를 낳은 것은 결혼한 지 20년이 지난 뒤(1894)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생들은 역적을 토벌해야 한다는 상소(討逆疎)를 냈고,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의병을 일으켰다. 윤희순의 시아버지 유홍석은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교전하다가 패배하고 춘천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에서 의병을 규합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부대는 춘천부사로 부임하던 조인승을 붙잡아 죽이는 전과(戰果)를 올리기도 했다. 조인승은 갑신정변 이후 김옥균의 처형을 청한 인물이며, 일제의 조선개혁안에 동의한 부역자(附逆者)였는데, 당시 단발령에 따라 머리를 빡빡 깎고 춘천으로 들어오다가 의병들에게 걸려 죽임을 당한 것이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