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왕, 원의 사위가 되다 2편
■ 고려왕, 원의 사위가 되다 2편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는 관제(官制)도 격하시키고, 왕실의 용어도 원에서 쓰는 용어보다 한 단계 격하된 용어로 바꾸었다. 선지(宣旨)는 왕지(王旨)로, 짐(朕)은 고(孤)로, 사(赦)는 유(宥)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위해 원에서 돌아온 충렬왕은 변발에 호복(胡服)차림을 하고 있었다. 충렬왕이 귀국하자 그를 본 많은 백성이 환호성을 질렀지만, 그가 하고 온 모습에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인 충렬왕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원에서 즐겼던 매사냥을 잊지 못해 즉위 초부터 응방(鷹坊)을 설치하여 사냥을 즐기는 등 향락에 탐닉하는 생활을 하였다.
비록 몽고의 침입이 끝난 뒤였지만, 원나라에 보낼 각종 공물(貢物) 때문에 전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상황을 생각하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다. 문제의 응방은 대표적 공물인 매 사육과 사냥을 전담하는 기구로서 개경뿐 아니라 각 도의 역(驛)과 외군(外軍)에도 설치되었다. 응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사냥을 좋아했던 충렬왕은 수시로 사냥을 나갔고, 마음이 내키면 멀리 충청도까지도 사냥 여행을 떠났다. 당시 사냥을 할 때에는 매 외에도 개를 동원하고, 화렵(火獵)이라 해서 밭이나 산에 불을 지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치에 놀란 제국공주가 왕의 잦은 사냥을 나무랄 정도였다. 충렬왕은 정력가이기도 했다. 사냥 뿐만 아니라 여색 또한 밝혀서 사냥을 핑계로 왕후 몰래 궁인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무비라는 궁인을 가장 총애하여 왕이 장단 도라산으로 사냥 나갈 때에는 반드시 무비를 데리고 가서 즐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비를 ‘도라산’이고도 불렀다.
어처구니없는 일로 백성의 원성을 자아내기는 제국대장공주도 마찬가지였다. 왕후는 하찮은 익명서의 무고를 믿고 김방경 등 중신들을 함부로 투옥하는가 하면, 충렬왕의 첫 부인인 나이 많은 정화궁주를 자기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오만한 짓도 저질렀다. 게다가 장사 수완도 좋아 일부 시종들의 말을 듣고 전국의 인삼이나 잣 등을 매점매석하고는 원나라 상인들에게 몰래 팔아 거액의 돈을 챙기기도 했다. 하지만 제국공주는 신혼 초를 빼고는 충렬왕의 바람기 때문에 무던히도 마음고생을 한 왕비였다.
그녀가 39세로 요절한 것도 아마 이 때문인 듯하다. 제국공주가 죽자 원나라에서는 혹시 궁중에 있는 임금의 총비들이 저주하여 죽은 것이 아닌가 하여 철저하게 조사했다. 애매한 여자가 한둘 희생당했고, 그녀의 아들 충선왕은 귀국하자마자 애첩 무비를 비롯한 측근들을 살해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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