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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7일 수요일

고려왕, 원의 사위가 되다 2편

■ 고려왕, 원의 사위가 되다 2편

■ 고려왕, 원의 사위가 되다 2편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는 관제(官制)도 격하시키고, 왕실의 용어도 원에서 쓰는 용어보다 한 단계 격하된 용어로 바꾸었다. 선지(宣旨)는 왕지(王旨)로, 짐(朕)은 고(孤)로, 사(赦)는 유(宥)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위해 원에서 돌아온 충렬왕은 변발에 호복(胡服)차림을 하고 있었다. 충렬왕이 귀국하자 그를 본 많은 백성이 환호성을 질렀지만, 그가 하고 온 모습에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인 충렬왕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원에서 즐겼던 매사냥을 잊지 못해 즉위 초부터 응방(鷹坊)을 설치하여 사냥을 즐기는 등 향락에 탐닉하는 생활을 하였다.

비록 몽고의 침입이 끝난 뒤였지만, 원나라에 보낼 각종 공물(貢物) 때문에 전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상황을 생각하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다. 문제의 응방은 대표적 공물인 매 사육과 사냥을 전담하는 기구로서 개경뿐 아니라 각 도의 역(驛)과 외군(外軍)에도 설치되었다. 응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사냥을 좋아했던 충렬왕은 수시로 사냥을 나갔고, 마음이 내키면 멀리 충청도까지도 사냥 여행을 떠났다. 당시 사냥을 할 때에는 매 외에도 개를 동원하고, 화렵(火獵)이라 해서 밭이나 산에 불을 지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치에 놀란 제국공주가 왕의 잦은 사냥을 나무랄 정도였다. 충렬왕은 정력가이기도 했다. 사냥 뿐만 아니라 여색 또한 밝혀서 사냥을 핑계로 왕후 몰래 궁인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무비라는 궁인을 가장 총애하여 왕이 장단 도라산으로 사냥 나갈 때에는 반드시 무비를 데리고 가서 즐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비를 ‘도라산’이고도 불렀다.

어처구니없는 일로 백성의 원성을 자아내기는 제국대장공주도 마찬가지였다. 왕후는 하찮은 익명서의 무고를 믿고 김방경 등 중신들을 함부로 투옥하는가 하면, 충렬왕의 첫 부인인 나이 많은 정화궁주를 자기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오만한 짓도 저질렀다. 게다가 장사 수완도 좋아 일부 시종들의 말을 듣고 전국의 인삼이나 잣 등을 매점매석하고는 원나라 상인들에게 몰래 팔아 거액의 돈을 챙기기도 했다. 하지만 제국공주는 신혼 초를 빼고는 충렬왕의 바람기 때문에 무던히도 마음고생을 한 왕비였다.

그녀가 39세로 요절한 것도 아마 이 때문인 듯하다. 제국공주가 죽자 원나라에서는 혹시 궁중에 있는 임금의 총비들이 저주하여 죽은 것이 아닌가 하여 철저하게 조사했다. 애매한 여자가 한둘 희생당했고, 그녀의 아들 충선왕은 귀국하자마자 애첩 무비를 비롯한 측근들을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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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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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 원의 사위가 되다 1편

■ 고려왕, 원의 사위가 되다 1편

■ 고려왕, 원의 사위가 되다 1편

충렬왕(忠烈王:1236~1308, 재위 1274~1308)은 원나라 황실과 처음으로 혼인을 맺은 고려의 왕으로 원 세조(쿠빌라이칸)의 사위이다. 충렬왕은 원종의 맏아들이자 정순왕후 김씨 소생으로 1236년에 태어났다. 1267년 태자로 책봉된 이후 원나라에 입조하여 연경(북경)에 머무르다가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하였다. 충렬왕과 원 공주와의 혼인은 1271년(원종 12) 부왕인 원종이 추밀원사 김연을 원 세조에게 보내서 정식으로 청혼하였고 그 해 6월 충렬왕은 세조를 알현하고 혼인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6개월 후 충렬왕은 천여 근의 금을 마련하여 원나라로 가서 1년 반쯤 지난 뒤인 1274년(원종 15) 5월에 원 세조의 딸 홀도로게리미실 공주(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다.

충렬왕이 살았던 시기는 몽고가 원(元)이라고 국호를 바꾸고 대제국을 건설한 시기였다. 세조 쿠빌라이는 몽고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의 손자이며, 고려 충렬왕의 장인이었다.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이 물려준 대제국을 잘 다스리고 더 넓힌 인물이다. 원나라에 굴복한 고려는 그들의 명령을 따르는 일개 제후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 나아가 원 황실과 고려 왕실간의 통혼으로 고려는 원의 사위의 나라가 된 것이다. 원래 고려왕들은 후비(后妃)를 왕실이나 귀족가문에서 맞아들였으나, 몽고와의 오랜 항쟁이 끝나고 나서 고려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을 해야 했다. 원이 고려왕을 부마로 삼고자 한 이유는 고려를 감시하기 위한 정략적 이유가 컸다. 이후 고려왕의 묘호(시호)는 조(祖)나 종(宗)이 아닌 원 황실에 충성을 한다는 의미로 충(忠)이라는 돌림자를 사용해야 했다. 원제국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처음으로 치러진 대륙국가와의 왕실 혼인으로, 고려는 역사의 한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양국의 우호관계를 배경으로 역대 권신들에 억눌려 오던 왕실의 지위는 회복, 강화될 수 있었으나 자주성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하여 이후 원나라의 많은 간섭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마흔이 다 된 나이로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한 충렬왕은 이미 태자로 책봉된 직후 왕녀인 정화궁주와 혼인하여 장성한 자녀까지 둔 유부남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와서 몽고양식의 생활을 하고 사사로이 부리는 사람도 원나라에서 데려옴으로써 고려 왕실에는 몽고의 풍속·언어 등이 퍼지기도 하였다.혼례를 치르고 두 달 뒤 부친인 원종이 승하하자, 충렬왕은 왕위 승계를 위해 고려로 돌아왔다. 어린 나이에 충렬왕에게 시집 온 제국대장공주는 남편과의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는 않았다. 충렬왕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고 그 부인과 좋은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비록 금실이 좋지는 않았지만, 공주는 이듬해에 아들을 낳았고, 그가 충렬왕을 이은 충선왕이다. 고려 왕실 최초의 혼혈 왕이기도 한 충선왕 이후로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에서 일명 뚤루게(禿魯花)인 질자(質子:인질로 보낸 아들)로 성장하게 되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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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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