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금요일

수양대군과 계유정난 2편

■ 수양대군과 계유정난 2편

■ 수양대군과 계유정난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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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년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과 55년 후 1453년에 일어난 계유정난은 거의 똑같을 정도로 전개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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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의 동생인 안평대군은 호탕하고 사람 좋아하고 예술적 재능도 있어, 문인이나 조정대신들과 잘 어울렸기 때문에 김종서와 황보인 등 조정대신들은 안평대군 편에 있었다. 그리고 안평대군은 정치적 실권을 가지려는 야심은 있었지만 왕위에 오르려는 야욕은 없다는 것을 조정대신들에게 확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이에 비해 수양대군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 조정대신들과 대립각을 세우며 왕위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만약, 이 시기에 김종서와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과 힘을 합쳐 선수를 쳤으면 수양대군을 역적으로 몰아 죽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계유정난이 성공한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수양대군은 당시 동원할 병력이 없어서 자신과 처가의 노비들을 몰고 갔다.(김종서도 수양의 노비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리고 무기도 변변치 않아 농기구 같은 것을 들고 싸웠다. 수양대군은 당시 자기 세력이 김종서나 안평대군에 비해 아주 뒤쳐져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수양에게 이런 상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조선은 명나라에 단종의 즉위를 보고하러 가는 사은사(謝恩使)를 보내야 했는데, 이 사은사를 수양대군이 자청한 것이다. 명에게 왕의 즉위, 세자 임명 등을 모두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사은사는 아무나 보낼 수 없었고, 왕족이나 정승 급은 되어야만 했다.

그 당시 명나라도 영락제가 조카를 죽이고 황제에 올라있던 시기였다. 영락제와 같은 꿈을 꾸는 수양대군으로서는 영락제와 안면을 트는 절호의 기회였고, 영락제로 부터 확실한 눈도장을 찍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조선에 없을 때 김종서나 안평대군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게 문제였다. 수양대군은 이에 대한 방비책으로 김종서와 황보인의 아들들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갔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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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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