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1일 일요일

간택 2편

■ 간택 2편

■ 간택 2편

금혼령이 공포되면 해당 연배의 처녀를 둔 전국 사대부 가문에서는 사주단자(四柱單子)와 함께 부, 조, 증조, 외조의 이력을 기록한 신고서를 국가에 올려야 했다. 이 신고서를 처녀단자(處女單子)라고 하였다. 처녀단자는 예조(禮曹)에서 모아 왕에게 올렸다. 왕비 간택은 대체로 왕실의 어른인 대비가 주관하였는데, 대비는 처녀단자를 보고 그 중에서 가문과 사주가 좋은 처녀를 골랐다. 하지만, 이것은 형식이고 왕비감은 미리 정해 놓고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왕비를 간택할 때 세 차례의 심사과정을 거침으로써 최대한 공정성을 기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왕비를 뽑는 중요한 행사를 전국적으로 알려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고 널리 왕비감을 물색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알렸다.

왕비 간택 시에는 먼저 상궁으로 하여금 왕비로 예정된 처녀의 집으로 가서 뜻을 정하고 당사자를 살폈다. 단,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내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사주가 나쁘면 간택되지 못했다. 처녀단자를 받아들인 후에는 금혼령을 해제하였다. 그리고 가례도감(嘉禮都監)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하여 간택과 혼례를 주관하였다.

조선시대 국왕은 보통 8세 전후 세자에 책봉되면서 혼인을 하게 된다. 남자가 여덟 살이 되면 영구치가 나오고 지식이 늘어나기에 이때를 전후해 세자책봉을 하고, 세자에 책봉된 후에는 동궁(東宮)에 살면서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아예 혼인을 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조선시대 왕비는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하였다가, 세자가 왕위에 즉위한 후 정식 왕비에 책봉되었다.

간택은 초간택(初揀擇) - 재간택(再揀擇) - 삼간택(三揀擇)으로 이루어졌다. 보통 초간택에서 서류심사(처녀단자심사)로 뽑은 30명 안팎의 후보자 중에서 대여섯 명의 처녀들을 뽑고, 재간택에서 세 명, 그리고 삼간택에서 최종적으로 마지막 한 명을 뽑았다. 초간택에서는 약 30~40명의 처자들이 궐내에 들어오면 넓은 마루에 모아놓고, 각기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방석위에 앉힌 뒤 다과를 먹게 하여, 그 용모와 행동거지를 살폈다. 부덕(婦德)과 집안의 가계, 미모,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처녀를 뽑기 위함인데, 이씨(李氏)는 본관을 불문하고 제외되었다. 이는 엄격한 유교 질서에 따라 동성혼을 금했기 때문이다.

재간택에서 뽑힌 3명의 후보자를 두고 이루어지는 마지막 삼간택은 왕과 왕비의 앞에서 치루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때 왕과 왕비는 발을 드리운 안쪽에서, 궁녀들은 면전에서 그들을 관찰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정승들과도 논의를 거치게 된다. 이 논의에서 어느 가문의 규수를 왕비나 세자빈으로 정할지가 결정되는데, 비빈(妃嬪)의 간택이 정치상황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왕실혼은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허다하였고, 보통 국혼은 사대부가(士大夫家)가 왕의 측근인 외척이 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왕비를 배출한 가문은 당대의 명문거족이거나, 또는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명문거족으로 발돋움하기도 하였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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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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