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현세자 7편
■ 소현세자 7편
소현세자는 죽은 후 경기도 고양시에 묻혔는데, 무덤 역시 ‘원’(園)으로 부르지 않고 묘로 명명하였다. 인조는 한 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을 방문한 적이 없다. 처음에는 ‘소현묘’라고 불리다가 고종 때에 이르러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다.
인조의 세자빈에 대한 적개심은 멈출 줄 모르다가 결국 세자빈 강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646년 1월 3일, 인조의 수라상에 올린 전복구이에서 독이 발견되었다. 인조는 세자빈을 모시는 5명의 빈궁 나인(內人)과 임금의 수라를 만드는 주방 나인 3명을 잡아들여 세자빈 강씨가 시킨 것이 아닌지 사실을 말하라고 모진 고문을 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소용 조씨의 참소(讒訴)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극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결코 거짓 자백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조는 후원의 별당에 세자빈 강씨를 가둔 후 별당 문에 구멍을 뚫어 음식과 물을 넣어 주게 하는 비인간적인 처사를 단행했다.
세자가 된 봉림대군이 그 처사에 대해 강력히 주장하자 비로소 시녀 한명을 들여보내 시중을 들게 했다. 인조가 세자빈과 말을 나누는 사람은 벌을 주겠다고 한 이래로 인조가 머무르는 대전과 빈궁전 사이에 전혀 왕래가 없었으므로 전복구이에 독을 넣은 일은 거의 불가능했는데도 세자빈 강씨에게 누명을 씌워 유폐시켰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인조는 이 일을 구실 삼아 결국엔 세자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인조실록》은 강빈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그녀의 강한 기질이 죽음을 자초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인조의 잔인함은 부모를 모두 잃은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인 석철(12세), 석린(8세), 석견(4세)을 제주에 유배시키기에 이르렀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소생 중 석철을 데려다가 청에서 키우겠다는 용골대(龍骨大)의 제안에 혹시라도 왕 자리를 손자에게 빼앗길까봐 무척 두려워해, 어린 아이들을 제주로 유배시킨 것이다. 그나마 인조는 어린 나이를 배려하여 세 아이를 모두 제주도 한곳에 살도록 하고 내시 김광택과 나인 옥진 등으로 하여금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제주로 유배 간 지 고작 1년 만인 1648년, 석철은 병 들어 죽고 뒤이어 석린도 세상을 떠났다.
소현세자의 유일한 핏줄인 홀로 남은 석견은 효종(孝宗) 때가 되어서야 유배에서 풀려나 1656년 효종 7년 경안군으로 복위되었다. 또한 강백년을 비롯한 강빈의 무고함을 주장하다가 삭직(削職)당하거나 좌천(左遷) 당한 사람 역시 모두 사면되거나 복권 되었는데, 특히 강백년은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기도 하였다. 효종이 선대왕 대에 마무리 된 것처럼 보였던 소현세자의 두 아들의 사망을 재조사한 것으로 보아 음모세력이 있었음은 분명하였다. 그 음모세력의 주축세력은 역시 김좌점과 귀인 조씨이다. 이들은 효종재위 2년 만에 역모를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결국 모두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8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